장경판전의 과학 — 콘크리트가 지고 나무가 이긴 이유

해인사 장경판전 외경 — 살창이 촘촘히 난 나무 창고 건물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해인사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팔만대장경 목판을 보러 갑니다. 그런데 정작 학자들이 주목하는 쪽은 목판이 아니라, 그 목판을 500년 넘게 품고 있는 낡은 건물입니다. 전기도 기계도 없이 8만 장이 넘는 목판을 뒤틀림 없이 지켜낸 이 건물의 원리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만 미리 밝혀 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건물이 왜 작동하는지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널리 알려진 환기와 바닥의 원리는 오랫동안 전문가들의 추정이었고, 실제로 측정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입니다. 이 글은 확인된 것과 아직 추정인 것을 구분해 적었습니다.

목판도 국보, 건물도 국보

장경판전은 목판을 담은 창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국보입니다. 안에 보관된 대장경판과 고려각판도 각각 별도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 이 자리에는 국보가 최소 두 겹으로 겹쳐 있는 셈입니다.

유네스코 등재도 두 갈래로 나뉩니다. 건물(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장경판 자체는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각각 따로 등재됐습니다. “팔만대장경이 유네스코에 등재됐다”는 말은 절반만 맞는 셈이고, 건물과 목판이 서로 다른 자격으로 두 번 인정받은 것이 정확한 그림입니다. 순서를 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 목판보다 건물이 12년 먼저 등재됐습니다.

건물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오랫동안 수수께끼였습니다. 창건 연대는 지금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1457년(세조 3년)에 40여 칸으로 크게 다시 지었고, 1488년(성종 19년)에는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 경각을 완성해 ‘보안당’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1488년이라는 연대의 결정적 물증은 문헌이 아니라 지붕의 기와 한 장에서 나왔습니다. 기와에 새겨진 ‘홍치원년(弘治元年)’ 각명이 서기 1488년을 가리키고, 이것이 성종 대 중수 기록과 맞아떨어집니다.

건물은 앞면 15칸·옆면 2칸의 긴 건물 둘이 남북으로 마주 서고(남쪽이 수다라장, 북쪽이 법보전), 동서에 작은 서고가 붙어 네모난 마당을 감싸는 구조입니다. 전체 4동이 국보 한 건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몽골의 칼끝에서 시작된 조판

목판이 왜 이렇게까지 지켜야 할 대상이 됐는지를 알려면 만들어진 사정을 봐야 합니다. 1232년(고종 19년)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밀려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운 그 상황에서 고려는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부처의 힘으로 몽골을 물리치겠다는 발원으로 대규모 조판 사업에 착수합니다.

1236년 시작한 이 작업은 1251년(고종 38년)에야 끝났습니다. 15년에 걸쳐 8만 장이 넘는 목판에 방대한 불교 경전을 새긴 이 결과물이 바로 팔만대장경입니다.

놀라운 것은 규모가 아니라 정확도입니다. 새긴 글자는 약 5,200만 자로 추산되는데, 오탈자가 거의 없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수기(守其) 스님이 이끈 교정단이 먼저 새긴 초조대장경은 물론 송나라판과 거란판까지 구해다 일일이 대조해 틀린 곳을 바로잡았고, 그 교정 기록이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으로 전해집니다. 판을 새기기 전에 원고를 검증하는 공정이 따로 있었던 셈입니다.

목판이 몇 장인지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흔히 “81,258장”이라는 숫자가 인용됩니다. 이것은 공식 지정 수량이고, 그 출처는 1915년 조선총독부의 집계입니다. 그런데 2024년, 10년간 실물을 다시 세어 본 유부현 교수의 연구에서는 81,350판이라는 다른 숫자가 나왔습니다.

세계기록유산의 수량조차 학자마다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 구체적인 숫자 대신 “8만 장이 넘는다”고 적은 이유입니다.

장경판전 내부 — 선반에 빼곡히 꽂힌 팔만대장경 목판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강화도에서 가야산까지 — 기록이 끊긴 이동

목판은 처음부터 해인사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진 곳은 강화도였고, 지금 자리로 오기까지 두 번의 긴 이동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이동은 기록이 상세합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1398년 5월 10일, 강화 선원사에서 옮긴 경판을 실은 배가 한강 용산강 나루에 닿았고 태조가 직접 나가 맞았습니다. 이틀 뒤인 5월 12일에는 2,000명이 동원되어 도성의 지천사까지 목판을 옮겼는데, 의장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수행했다고 합니다. 국가가 벌인 큰 행사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듬해 무렵 목판은 다시 남쪽 가야산 해인사로 떠나는데, 이 두 번째 이동은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 경로: 뱃길로 남해를 돌았다는 설과, 충주까지 물길로 간 뒤 고개를 넘었다는 설이 맞섭니다.
  • 이유: 1360년 왜구의 강화도 약탈을 근거로 왜구를 피하려 했다는 설과, 새 왕조의 위엄을 보이려는 국가 행사였다는 설이 나란히 있습니다.
  • 도착 시점: 이것조차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세계기록유산이 된 물건이 어느 길로 옮겨졌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이 유산을 둘러싼 공백 중 하나입니다.

경판 한 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경판 한 장은 가로 약 70cm, 세로 약 24cm, 두께 약 3cm이고 무게는 3kg 남짓입니다. 크기가 두 계열로 나뉘어 무거운 것은 4kg이 넘습니다.

자작나무가 아니었습니다

교과서에까지 실렸던 “자작나무” 설명은 오류입니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경판 209장을 전자현미경으로 분석한 결과, 실제 수종 구성은 이랬습니다.

수종 비율
산벚나무 약 64%
돌배나무 약 15%
거제수나무 약 9%
층층나무 약 6%
고로쇠나무 약 3%

후박나무까지 모두 일곱 종이 확인됐고, 하나같이 가야산 언저리에서 구할 수 있는 단단하고 결이 고른 나무들입니다. 멀리서 구해 온 특별한 재료가 아니라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나무를 골라 쓴 것입니다.

“바닷물에 3년 담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널리 퍼진 이야기지만, 사료에 이런 기록은 없습니다. 뒤틀림을 막기 위한 처리가 있었으리라고 후대가 재구성한 가설이며, 실제 공정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마감 쪽입니다. 글자를 새긴 판에 먹을 먹여 결을 메운 뒤 생옻을 두세 번 발랐습니다. 옻은 물과 벌레를 막는 천연 코팅제입니다. 양 끝에는 각목 마구리를 대고 귀퉁이를 구리판으로 감쌌는데, 분석해 보니 순도 99.6%가 넘는 구리였습니다.

이 마구리에는 숨은 기능이 있습니다. 판과 판이 서로 직접 닿지 않게 하고, 그 사이에 공기가 지나갈 틈을 만듭니다. 보관까지 염두에 둔 설계인 셈입니다.

바닥 밑의 자동 제습기 — 라고 전해집니다

장경판전 바닥에는 숯과 횟가루, 소금, 모래를 층층이 다져 넣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재료들은 습기를 빨아들이고 내뿜는 성질이 있어, 장마철에는 수분을 흡수하고 가문 날에는 다시 내놓아 실내 습도를 일정하게 맞춰준다는 설명입니다.

다만 이 대목은 전승과 해설의 영역입니다. 바닥을 파서 층 구조를 직접 확인한 적이 없고, 제습 작용이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측정된 자료도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널리 인용되는 만큼 자주 사실처럼 서술되지만, 엄밀히는 검증되지 않은 설명입니다.

창문 하나로 만든 바람길

장경판전에는 장식이 없습니다. 단청도 화려한 문살도 없습니다. 대신 창이 이상합니다.

  • 남쪽 벽: 아랫창이 윗창의 약 4배 크기
  • 북쪽 벽: 반대로 윗창이 더 큽니다

이 창들에는 창호지도 없습니다. 계절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기가 드나드는 붙박이 살창입니다. 국가유산청의 설명에 따르면 남쪽의 큰 창으로 들어온 공기가 건물 안을 한 바퀴 돌아 북쪽 윗창으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창 크기의 차이만으로 공기의 흐름에 방향을 준 것인데, 여기에 쓰인 부품은 나무 살창이 전부입니다.

장경판전 살창 클로즈업 — 위아래 크기가 다른 격자 창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원리는 아직 추정입니다 — 2016년에야 시작된 실측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위에 적은 환기와 바닥의 설명들은 오랫동안 실측으로 검증된 적이 없었습니다. 전문가들의 추정이었습니다.

2016년에야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과 합천군, 해인사가 판전 안팎에 ‘윈드스테이션’ 25대를 설치해 풍향·풍속·온습도를 10분 간격으로 재기 시작했습니다. 측정은 2018년 판전 전체로 확대됐고, 데이터는 지금도 쌓이는 중입니다. 당시 합천군 관계자는 내부 바람 흐름을 “사실상 처음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작업이라고 밝혔습니다.

500년 된 건물의 성능을 이제야 숫자로 확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데이터가 쌓일수록 어떤 설명은 확인되고 어떤 설명은 수정될 것입니다.

다만 원리의 설명이 추정이라는 것과, 성능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온도와 습도가 요동치면 나무는 갈라지고 뒤틀립니다. 그런데 이 건물 안의 목판은 770년을 버텼습니다. 성능의 증명은 목판 자체가 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술이 못 이긴 사례

이 건물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습니다. 1970년대, 목판을 더 안전하게 보관하겠다는 취지로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보관 시설이 세워졌고 일부 목판을 시험 삼아 옮겼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로와 뒤틀림 문제가 나타났고, 옮겼던 목판은 결국 장경판전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온도와 습도를 기계로 고정하려 한 시도가 오히려 목판에는 독이 된 셈입니다. 몇 해 만에 콘크리트 보존고가 만들어 낸 뒤틀림을, 이 나무 건물은 수백 년 동안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연도와 지시 주체를 특정한 1차 자료는 확인되지 않아, 이 글에서는 “1970년대”까지만 적었습니다.

차이는 접근 방식에 있습니다. 현대 보존고는 환경을 고정하려 했고, 기계가 멈추면 환경도 무너집니다. 장경판전은 반대로 산의 바람과 땅의 습기를 막는 대신 길들였습니다. 계절이 바뀌면 건물도 함께 숨을 쉬고, 목판은 그 리듬에 맞춰 천천히 마르고 천천히 젖습니다. 나무를 죽은 재료가 아니라 살아 있는 것으로 다룬 설계입니다.

불과 전쟁을 건너서

건물이 지킨 것은 습기만이 아닙니다.

해인사는 1695년 이후 일곱 차례나 불에 탔습니다. 특히 1817년(순조 17년)의 큰불은 절의 전각 대부분을 태웠는데, 그때도 장경판전만은 무사했습니다. 산비탈 가장 높은 자리에 마당을 넓게 두고 떨어져 앉은 배치 덕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전쟁도 지나갔습니다. 1951년 한국전쟁 중 해인사 일대를 폭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지만,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문화재를 지키려는 항명이었습니다. 훗날 문책을 받는 자리에서 “미군도 교토는 폭격하지 않았다”고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해인사에는 2002년 그의 공덕비가 세워졌고, 정부는 2010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며 이 판단을 공식으로 인정했습니다.

지금 판전은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2005년 5월부터 내부 관람이 제한됐고, 경판은 디지털로도 구리판으로도 다시 새겨지고 있습니다.

마치며 — 목판보다 오래 주목받아야 할 이유

흔히 팔만대장경을 보러 해인사에 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목판에 새긴 글자는 인쇄본으로도 디지털로도 남습니다. 대체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 목판을 770년 살려 둔 건물 쪽인지도 모릅니다.

화려한 장식 하나 없이 창의 크기와 바닥의 층과 앉은 자리만으로 일해 온 건물. 유네스코가 목판보다 이 건물을 12년 먼저 세계유산으로 올린 이유일 것입니다.

목판의 숫자를 다시 세고, 나무의 종을 현미경으로 확인하고, 바람의 길을 측정기로 좇는 일. 지금 우리가 하는 보존이란 옛사람의 답안지를 뒤늦게 채점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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