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프랑스 파리의 국립도서관 수장고에 낡은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이 책 한 권이 인쇄의 역사를 78년 앞당겨 놓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청주에서 만들어져 파리에 있게 된 이 책, 직지심체요절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1377년 청주, 쇳물로 글자를 만들다
정식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줄여서 『직지』입니다. 고려 말 승려 백운화상(1299~1374)이 엮은 선불교의 요체를 담은 책으로, 1377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됐습니다.
활자 하나하나를 쇳물을 부어 만들고, 필요한 글자를 골라 판을 짜고, 먹을 발라 종이에 찍어내는 방식입니다. 목판에 글자를 통째로 새기던 목판 인쇄와 달리, 활자를 재조합해 다른 책도 찍어낼 수 있다는 점이 금속활자의 강점입니다.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선 현존 최고(最古)
서양 인쇄술의 상징인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는 1455년 무렵 인쇄됐습니다. 직지는 이보다 약 78년 앞서 만들어졌고,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인정받아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습니다.
다만 정확히 표현하자면 “현존 최고(最古)”입니다. 고려는 이보다도 앞선 13세기에 이미 금속활자로 책을 찍었다는 기록(1234년 무렵 인쇄된 것으로 전하는 『상정고금예문』)이 있지만, 그 실물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물이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직지가 가장 오래됐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백여 년 전 프랑스로, 그리고 수장고 속 발견
직지는 본래 상·하 2권으로 인쇄됐지만 상권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하권 1책만 전합니다. 이 책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주한 프랑스 공사였던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간 뒤, 현재까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오랫동안 도서관 서고에 방치돼 있던 이 책의 가치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재불 한국인 학자 박병선 박사입니다.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던 박병선 박사는 우연히 서고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연구를 거쳐 1972년 전시회에서 그 가치를 발표했습니다. 이 연구가 바탕이 되어 2001년 직지는 정식으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됩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유
직지가 약탈이 아닌 정식 수집·구매 절차로 프랑스에 건너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니, 반환 협상은 간단하지 않은 사안입니다. 세계가 인정한 인쇄 역사의 시작점이 정작 고향인 청주가 아니라 파리에 남아 있는 셈입니다. 청주에는 흥덕사 옛터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고, 이곳에 세워진 고인쇄박물관이 직지의 역사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며 — 발견되지 않았다면 몰랐을 역사
직지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인정받기까지는 만든 사람뿐 아니라, 백여 년 뒤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의 역할도 컸습니다. 서고 한구석에 방치돼 있던 책 한 권이 인쇄 역사의 시작점을 다시 쓴 것처럼, 아직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기록들이 어딘가에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