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경(다뉴세문경) — 0.3밀리미터의 선을 그은 도구

완주 갈동 출토 정문경(보물) — 국보 정문경과 같은 유형의 청동거울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손바닥만 한 청동거울입니다. 지름 21.2센티미터. 뒷면에 선이 1만 3천 개 이상 새겨져 있고, 선과 선 사이는 0.3~0.34밀리미터입니다. 선 자체의 굵기는 0.1~0.2밀리미터입니다.

머리카락 굵기가 대략 0.05~0.1밀리미터입니다. 선 사이 간격이 머리카락 서너 올 정도라는 뜻입니다. 이 수치는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2007~2008년 정밀 조사해 실측한 값입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기원전 4~3세기입니다. 국가유산포털은 청동기시대로, 국립중앙박물관은 초기철기시대로 적고 있어 폭을 두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 이름부터 — 공식 명칭은 정문경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 은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 우메하라 스에지가 붙인 이름입니다. “고리가 여럿이고 무늬가 가는 거울”이라는 뜻으로, 형태를 설명하는 명칭입니다.

지금 국가유산포털의 등재명은 「정문경(精文鏡)」 입니다. “정교한 무늬의 거울”이라는 뜻입니다. 국가유산청 사진 검색도 “정문경”으로 해야 나옵니다.

국보로 1971년 12월 21일 지정됐고(구 국보 제141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자동 번역이 이를 “숭실여대”로 옮기는 경우가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현대 기술로도 재현 불가”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 유물을 소개하는 글에 거의 반드시 따라붙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 기술로도 재현하지 못한다”, “카이스트가 도전했다가 포기했다”, “슈퍼컴퓨터로도 이 선을 그릴 수 없다”…

전부 사실이 아니거나 출처를 찾을 수 없습니다.

  • 재현은 성공했습니다. 이완규 주성장이 2007년 활석 거푸집으로 재현에 성공해 전승공예대전 국무총리상을 받았습니다. 윤용현 등도 활석과 밀랍을 결합한 방식으로 재현했습니다.
  • 카이스트 도전·포기, 슈퍼컴퓨터, 세계 학술지의 “재현 불가 유물” 수록 — 이 세 가지는 1차 출처를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서로를 인용하며 퍼진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 유물이 대단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단함을 설명하려고 없는 사실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답은 손끝이 아니라 도구였다

그렇다면 이 선들은 어떻게 그었을까요.

2019년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국립중앙박물관 박학수 학예연구관이 발표한 내용이 지금까지의 가장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 참빗살 21가닥의 끝을 깎아 만든 다치구(多齒具) 컴퍼스 로 여러 동심원을 한 번에 그었습니다
  • 직선과 격자는 대나무 자 같은 도구를 썼습니다
  • 대나무 껍질 도구로 재현이 가능함을 실증했습니다

핵심은 한 줄씩 그은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 줄씩 그었다면 1만 3천 번을 손으로 반복하면서 0.3밀리미터 간격을 유지해야 합니다. 사람의 손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빗살처럼 여러 개의 날을 나란히 고정해 한 번 그으면 그 간격이 그대로 복제됩니다. 간격의 정밀도는 손이 아니라 빗살을 깎을 때 이미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 도구를 컴퍼스 팔에 물려 돌리면 동심원 여러 개가 동시에 생깁니다.

정밀함의 출처를 손재주에서 도구 설계로 옮긴 것 — 이것이 이 유물이 보여주는 공학적 사고입니다.

완주 갈동 출토 정문경(보물) — 같은 유형 청동거울의 무늬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주석 32퍼센트 — 깨질 각오를 하고 밝기를 택했다

합금 비율도 보통 청동기와 다릅니다.

구리주석
정문경61.68%32.25%5.46%
일반 청동기22% 안팎

주석을 많이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더 잘 깨집니다. 대신 색이 희어지고 반사율이 올라갑니다.

거울로 쓰려면 잘 비쳐야 합니다. 그래서 내구성을 일부 포기하고 반사 성능을 택한 것입니다. 재료의 성질을 알고 용도에 맞춰 배합을 조정했다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비율이 중국 고전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가 적은 거울용 이상 비율(2:1)과 오차 약 1퍼센트 안에 들어온다는 점입니다. 문헌으로 전해지는 이상값과 실제 유물의 성분이 거의 맞아떨어지는 사례입니다.

목에 걸고 다닌 물건이었다

이 거울은 벽에 걸어 두거나 상자에 넣어 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뒷면 고리(뉴)의 바깥 윗부분에 끈에 매달아 쓴 마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끈이 반복적으로 스치면서 생긴 자국입니다. 실제로 몸에 걸고 다녔다는 물증입니다.

국가유산포털의 분류도 무속구입니다. 실용 거울이 아니라 의기(儀器) 로 봅니다. 제의를 주관하는 사람이 가슴에 걸었을 때, 햇빛을 받아 강하게 반사되는 원반이 어떤 효과를 냈을지는 상상해 볼 만합니다. 주석 32퍼센트의 선택이 다시 읽히는 대목입니다.

다만 “태양 숭배의 상징”이라는 설명은 널리 알려졌을 뿐 확정된 사실은 아닙니다. 반론이 있습니다.

거푸집 논쟁 — 국가 기관끼리도 설명이 다르다

이 선들을 새긴 것이 거푸집인지 완성품인지, 거푸집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도 정리된 문제가 아닙니다.

주체견해
국립중앙박물관사형(砂型) — 국보 실물에서 거푸집 주물사(모래)가 검출됨
국가유산청 월간지밀랍
이완규(재현 성공)활석

국보 141호 실물에 대해서는 주물사가 검출됐으므로 국립중앙박물관의 사형 결론이 가장 직접적인 근거를 갖습니다. 밀랍설과 활석설은 다뉴세문경이라는 유형 전반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 유물에 대해 단정하면 안 됩니다.

국가 기관끼리도 설명이 갈린다는 사실 자체가, 이 유물이 아직 다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국보인데 출토지가 불확실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국보의 출토지가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등록된 출토지는 두 번 바뀌었습니다.

  • 1979년 — 강원도
  • 1988년 — 충남
  • 1992년 — 논산

발견자가 참호를 파던 군인이었다는 증언이 전해집니다. 정식 발굴이 아니라 우연히 나온 물건이 유통 과정을 거쳐 박물관에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출토 맥락(어떤 무덤에서, 무엇과 함께 나왔는지)이 사라지면 유물이 말해 줄 수 있는 것도 크게 줄어듭니다.

참고로 “서기준이 기증했다”는 서술이 도는데, 서기준은 1950년 납북돼 1960년대에 기증이 불가능합니다.

흩어진 한 세트

국보 정문경(구 141호)과 국보 청동방울(구 146호, 리움미술관 소장)은 한 무덤에서 나온 세트로 추정됩니다. 제의를 주관하던 한 사람의 물건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지금 이 둘은 서로 다른 박물관에 있고, 각각 별개의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출토지가 불확실해진 것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정리

  • 공식 명칭은 정문경입니다. 다뉴세문경은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의 작명입니다
  • 선 1만 3천 개, 간격 0.3밀리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실측치입니다
  • “재현 불가”는 사실이 아닙니다. 2007년 재현 성공, 2019년 도구 실증
  • 주석 32퍼센트는 깨지기 쉬움을 감수하고 반사율을 택한 결과입니다
  • 목에 걸고 다닌 마찰 흔적이 남아 있는 의기입니다
  • 국보이지만 출토지가 확정되지 않았고, 거푸집 논쟁도 진행 중입니다

※ 이 글의 사진은 보물 「완주 갈동 출토 정문경」입니다. 국보 정문경(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은 공공누리 제1유형 사진이 없어, 같은 유형의 다른 개체로 대신했습니다. 두 유물은 별개입니다.

참고 자료

관련 영상

유튜브 채널 「옛것의 과학」에서 다른 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요

저는 이 유물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대목이 참빗살 21가닥을 깎아 만든 다치구 컴퍼스라고 봅니다. “현대 기술로도 재현 불가”라는 말은 유물을 신비화하면서 정작 옛 장인을 마술사로 만들어 버리는데, 실제로는 간격의 정밀도를 손끝이 아니라 도구를 깎는 단계에서 미리 확정해 둔 설계의 문제였다는 쪽이 훨씬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깨질 것을 감수하고 주석을 32퍼센트까지 올려 반사율을 택한 배합도 같은 맥락으로 읽힙니다. 결국 이 거울의 대단함은 초인적인 손재주가 아니라 재료와 도구를 용도에 맞춰 계산한 사고방식에 있고, 그건 없는 전설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진다고 믿습니다. 다만 국보인데도 출토지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는 사실은, 유물이 말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우리가 얼마나 잃어버렸는지 보여 주는 것 같아 내내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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