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조선의 관리들은 비가 오면 흙을 파 보았습니다. 빗물이 땅에 얼마나 스며들었는지를 재는 방식이었습니다. 성실한 방법이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흙의 종류와 마른 정도에 따라 결과가 제각각이라, 어제와 오늘을 비교할 수도, 한양과 전주를 비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릇에 받자는 발상
세종실록에는 세자(훗날의 문종)가 우량 측정법을 연구하고 시험한 기록이 명시돼 있습니다. 그릇을 놓아 빗물을 직접 받고 깊이를 재면 흙의 조건과 무관한 값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측우기를 “장영실의 발명”으로 소개하는 글이 많지만, 실록의 기록은 세자가 연구·시험한 쪽을 가리킵니다. 장영실이 당대의 뛰어난 기술자였던 것과, 이 제도의 착안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진짜 발명은 그릇이 아니라 규격입니다
조정은 쇠로 만든 원통을 규격으로 정했습니다. 길이 약 42cm, 지름 약 17cm입니다. 재는 자도 주척으로 통일해 푼(分) 단위까지 측정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이 제도의 핵심입니다. 그릇의 지름이 다르면 같은 비가 와도 고인 깊이가 달라집니다. 자가 다르면 같은 깊이도 다른 숫자가 됩니다. 전국이 같은 그릇과 같은 자를 써야 비로소 숫자를 서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나라 전체가 하나의 관측망
측우 제도는 1441년(세종 23)에 시작돼 이듬해인 1442년에 규격과 보고 체계가 제도화됐습니다. 팔도의 감영마다 같은 통이 놓였고, 비가 그치면 관리가 깊이를 재 중앙에 보고했습니다.
즉 조선이 만든 것은 측정 도구 하나가 아니라 표준화된 전국 관측망이었습니다. 유럽에서 강우를 측정한 기록은 이탈리아의 카스텔리가 1639년에 남긴 것이 이르게 꼽히니, 약 198년의 차이가 납니다.
다만 이 숫자를 “우리가 더 똑똑했다”는 식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의미가 있는 지점은 시기의 선후보다, 국가가 농사를 위해 하늘을 기록하겠다고 결정하고 그것을 제도로 만들었다는 사실 쪽입니다.
남아 있는 것은 한 점뿐입니다
수백 개가 만들어졌을 측우기 중 현존이 확인된 실물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금영측우기) 한 점입니다. 1837년 제작된 것으로, 2020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됐고 국립기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유물 역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1971년에 반환됐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이 글과 영상의 썸네일에 보이는 명문(道光十年製 등)은 1837년에 만들어진 금영측우기의 것입니다. 이 글이 다루는 1441년의 제도와는 시기가 다릅니다.
마치며
비를 재려고 흙을 파던 나라가 그릇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그릇의 크기를 전국에서 통일했습니다. 발명이란 대개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일로 여겨지지만, 여기서는 같은 것을 쓰기로 약속한 일이 발명이었습니다.
참고 자료
관련 영상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