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1993년 12월 12일, 충남 부여의 한 절터에서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 사이의 이 땅에는 주차장이 들어설 예정이었고, 공사 전 마지막으로 이뤄지는 긴급 발굴이었습니다. 그날 목곽으로 짜인 수조 안에서 나온 것이 지금의 국보 백제 금동대향로입니다.
구덩이에는 물이 차 있었습니다. 유물이 상할까 봐 삽 대신 종이컵으로 물을 퍼냈고, 그렇게 네 시간을 매달린 끝에 진흙 속에서 금빛 향로가 올라왔습니다.
진흙이 지켜 낸 도금
청동은 공기와 만나면 산화합니다. 1,400년을 땅속에 있었다면 표면이 푸르게 부식돼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이 향로는 금 도금까지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나왔습니다.
이유는 묻힌 자리에 있었습니다. 향로는 물이 고인 목곽 수조 안, 진흙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진흙과 물이 공기를 차단하면서 산소가 금속 표면에 닿지 못했고, 부식이 진행될 조건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절은 누가 왜 세웠나
향로가 나온 자리가 어떤 곳인지는 2년 뒤에 밝혀졌습니다. 1995년 발굴에서 절터의 목탑 자리 아래에 돌로 만든 사리감이 묻혀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표면에 새겨진 글자에는 성왕의 아들 창왕, 곧 위덕왕이 567년에 이 절을 세웠고 성왕의 딸인 공주가 사리를 바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사리감은 별도로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백제 성왕은 554년 관산성 싸움에서 신라군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들 위덕왕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릉 곁에 절을 지었고, 그것이 능산리 절, 이른바 능사입니다. 향로는 이 절의 공방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에서 나왔습니다. 물건을 만들던 자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이 향로가 어디서 들여온 물건이 아니라 백제에서 직접 만든 것이라는 유력한 근거가 됩니다.
네 부분으로 쌓아 올린 하나의 세계
향로는 높이 61.8cm, 무게 11.8kg에 이릅니다. 향로치고는 상당한 크기입니다. 구조는 아래에서 위로 네 부분이 이어집니다.
받침에서는 용 한 마리가 몸을 비틀어 향로 전체를 받쳐 들고 있습니다. 그 위 몸체는 연꽃잎이 겹겹이 감싼 형태이고, 뚜껑은 겹겹이 솟은 산봉우리로 조각돼 있습니다. 봉우리 사이사이에는 악사 다섯 명과 여러 동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정상에는 날개를 편 봉황이 앉아 있습니다.
악사 다섯 명이 든 악기는 각각 다릅니다. 완함, 종적, 배소, 거문고, 북입니다.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백제의 음악을 짐작하게 하는 드문 자료이기도 합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고, 신선이 산다는 산과 봉황은 도교의 세계관에 속합니다. 두 세계가 한 몸에 얹혀 있는 셈입니다. 뚜껑의 산을 도교의 봉래산으로 보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역시 단정하기는 어려운 견해입니다.
도상의 수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산봉우리 23개, 인물상 16명, 동물 39마리라는 수치가 널리 쓰입니다. 국립부여박물관 계열 자료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얼굴 단위로 세면 사람 19명, 짐승 67마리, 합쳐 86개라는 집계도 있습니다. 전신상을 세느냐 얼굴을 세느냐, 뚜껑만 보느냐 몸체까지 포함하느냐에 따라 갈리는 것이라 어느 한쪽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숫자를 인용할 때는 어느 기준인지 함께 밝히는 편이 정확합니다.
거푸집을 깨야 꺼낼 수 있는 물건
이렇게 복잡한 형태를 어떻게 통째로 부어 만들었을까요. 밀랍주조법입니다.
벌집에서 얻은 밀랍에 송진을 섞어 향로 모양을 먼저 통째로 조각합니다. 산봉우리도 짐승도 악사도 전부 밀랍으로 빚습니다. 그 밀랍 덩어리를 흙으로 감싸 단단히 굳힌 다음 열을 가하면 안의 밀랍이 녹아 흘러나오고, 밀랍이 있던 자리가 그대로 빈 공간이 됩니다. 거기에 청동 쇳물을 붓습니다. 밀랍이 사라지면서 형태만 남긴다고 해서 실랍법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방식에는 한 가지 성질이 따라붙습니다. 한 번 부으면 거푸집을 깨야 꺼낼 수 있으니, 똑같은 것을 두 개 만들 수 없습니다.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뜻입니다. 향로는 용 받침과 연꽃 몸체와 산악 뚜껑을 따로 부어 만든 뒤 맞췄고, 봉황은 그 위에 붙였습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박산향로 — 받아들인 형식, 달라진 결과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산을 뚜껑으로 옮겨 놓은 향로를 박산향로라고 부릅니다. 중국 한나라 때부터 만들어졌고, 백제도 그 형식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중국의 박산향로는 산이 무늬처럼 납작하게 눌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금동대향로는 다릅니다. 봉우리 하나하나가 손으로 만져지는 입체이고, 그 사이에 사는 짐승과 사람이 저마다 따로 살아 있습니다. 같은 형식을 받아들여 전혀 다른 물건으로 만든 셈입니다.
연기가 지나갈 길을 미리 계산했다
이 향로에서 가장 정교한 부분은 뚜껑입니다. 구멍은 모두 12개입니다. 맨 위 봉황의 가슴 좌우에 2개, 산봉우리 윗줄에 5개, 아랫줄에 5개입니다.
뚜껑이 덮인 통 안에서 불이 계속 타려면 연기가 나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간 만큼 새 공기가 들어와야 합니다. 산소가 끊기면 불은 꺼지기 때문입니다.
국립부여박물관 보존과학실은 2017년부터 이 문제를 파고들었습니다. 국보로 직접 실험할 수는 없으니 향로를 CT로 촬영하고 3차원으로 정밀 스캔한 뒤, 그 데이터로 정밀 재현품과 시판 복제품을 만들어 실제로 향을 피워 봤습니다. 결과는 2019년 『보존과학회지』에 실렸습니다.
확인된 것은 이렇습니다. 봉황 가슴의 2개와 산봉우리 윗줄 5개, 이 7개가 연기를 내보내는 배연공입니다. 아랫줄 5개는 바깥 공기를 빨아들이는 흡기공이었습니다. 향이 타면 뜨거워진 연기가 위로 오르고, 일부는 봉황과 윗줄 구멍으로 빠져나갑니다. 미처 나가지 못한 연기는 식으면서 아래로 내려오고, 그 빈자리를 아랫줄 구멍으로 들어온 찬 공기가 채웁니다. 향로 안에서 공기가 도는 것, 곧 대류입니다.
그 결과 향을 피우면 연기가 산봉우리를 감싸며 흘러갑니다. 산에 구름이 걸린 풍경이 향로 위에서 재현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구멍 크기가 제각각입니다
여기서부터가 이 유물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2개 구멍을 하나씩 실측해 보니 크기가 고르지 않았습니다. 봉황 가슴의 두 개는 지름 3.8mm와 3.88mm, 산봉우리 윗줄의 두 개는 4.63mm와 4.65mm였습니다. 이 4개가 원래 크기입니다. 나머지 8개는 4.67mm에서 8.94mm까지 제각각이었고, 넓혀진 자리는 동그랗지 않고 가장자리가 거칠었습니다. 인위적으로 확장한 것이 분명한 형태였습니다.
왜 넓혔을까요. 연구진이 아랫줄 구멍을 원래의 작은 크기로 되돌려 놓고 향을 피워 봤습니다. 향은 꺼졌습니다. 공기가 충분히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배연공 크기에 따라서는 연기의 양과 불완전 연소 정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순서는 이렇습니다. 백제 장인은 향로를 다 만들고 나서 향을 피워 봤습니다. 불이 자꾸 꺼졌습니다. 그래서 완성된 국보의 뚜껑에 연장을 대고 구멍을 넓혔습니다. 그것도 여덟 군데를.
발굴 지도위원이었던 윤무병 교수는 이 거친 마감을 두고 백제인의 자유분방함, “대충대충” 의식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2019년 실험은 그것이 미감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을 맞추기 위한 조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흠집이 아니라 시행착오의 흔적인 셈입니다.
벽난로와 같은 원리입니다
아래로 공기가 들어오고 위로 연기가 나가는 구조는 지금도 그대로 쓰입니다. 벽난로와 장작난로가 정확히 이 방식입니다. 아래쪽에 공기 조절판이 있고 위쪽에 연통이 있습니다.
굴뚝이 높을수록 잘 빨려 나가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뜨거운 공기가 오르면서 아래쪽에 낮은 압력을 만들고, 그 힘이 새 공기를 끌어들입니다. 굴뚝효과(stack effect)라고 부릅니다.
다른 점은 검증하는 방법입니다. 지금은 컴퓨터로 공기 흐름을 미리 계산해 봅니다. 백제 장인에게는 그런 도구가 없었습니다. 대신 만들고, 피워 보고, 안 되면 넓혔습니다. 도구는 없었지만 방법 자체는 같았습니다. 짐작하고, 시험하고, 고치는 것. 1,500년 뒤 국립부여박물관이 재현품을 만들어 향을 피워 본 것도 결국 같은 일이었습니다.
왜 물웅덩이에 있었나
향로는 1996년 국보로 지정됐고 지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있습니다. 제작 시기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백제 위덕왕에서 무왕 무렵으로 추정됩니다.
남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왕실 사찰의 보물이 왜 공방터의 물웅덩이에 처박혀 있었을까요.
660년 사비성이 무너질 때 누군가 약탈을 피해 급히 묻었다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정황은 그럴듯합니다. 정식으로 보관한 물건이라면 나올 만한 자리가 아니고, 포장이나 매납 시설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렇게 적힌 기록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정이고, 이 대목을 단정적으로 서술한 자료를 만나면 한 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결과입니다. 급히 숨긴 그 자리가 1,400년짜리 보관실이 됐습니다.
마치며
우리는 완성된 국보를 봅니다. 그런데 그 국보에는 만든 사람이 실패했던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연장으로 거칠게 넓힌 여덟 개의 구멍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물건일수록 그 안에는 고쳐 쓴 흔적이 있다는 것. 백제의 장인이 1,400년 만에 알려준 셈입니다.
참고 자료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백제 금동대향로」
- 국립부여박물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제금동대향로」
- 김선영·황현성, 「분향실험을 통한 백제금동대향로 내부 대류특성 연구」, 『보존과학회지』 35(5), 2019, 470–479 (DOI 10.12654/JCS.2019.35.5.09)
- 우리역사넷, 「재료와 제작 기법」
관련 영상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