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사지 십층석탑 — 비에 녹는 국보가 실내로 들어온 이유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 국립중앙박물관 실내 전시 전경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국립중앙박물관 1층 “역사의 길”에 들어서면 13.5미터짜리 십층 석탑이 실내에 서 있습니다. 석탑은 원래 밖에 있는 물건입니다. 절터에 서서 비바람을 맞으며 천 년을 버티는 것이 석탑의 일이죠. 그런데 이 탑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밖에 두면 녹기 때문입니다.

화강암이 아니라 대리석이다

한국의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입니다. 불국사 삼층석탑도, 정림사지 오층석탑도 화강암입니다. 그런데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대리석입니다. 한국 석탑에서 이례적인 재질입니다.

이 차이가 그냥 색깔이나 질감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화학이 다릅니다.

주성분 산에 대한 반응
화강암 규산염 광물(장석·석영·운모) 산에 강하다
대리석 방해석 = 탄산칼슘(CaCO₃) 산에 녹는다

탄산칼슘은 산과 만나면 반응해 녹아 나갑니다. 대리석 조각상이 오래된 유럽 도시에서 유독 심하게 뭉개져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같은 비를 맞아도 화강암 탑은 버티고 대리석 탑은 삭습니다.

40년 야외, 10년 치료

이 탑은 1960년 경복궁에서 복원돼 야외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산성비와 대기오염으로 표면이 심하게 훼손됐습니다. 조각이 얕아지고 윤곽이 흐려졌습니다. 이 탑의 값어치가 표면을 빼곡히 채운 조각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잃은 것이 적지 않습니다.

  • 1995년 — 해체
  • 1995~2005년 —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약 10년간 보존처리
  • 2005년 —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재개관과 함께 실내 재조립

“산성비 때문에 실내로 들였다”는 것은 박물관의 공식 서술입니다. 유물을 원래 자리에 두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 원칙이 유물을 없앨 때는 원칙을 바꿔야 합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 조각 디테일 — 탑신에 빼곡히 새겨진 불회도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돌에 새겨진 연도 — 추정이 아니다

이 탑은 1348년(고려 충목왕 4) 3월에 세워졌습니다. 이게 추정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1층 탑신의 명문(조탑기)에 원나라 연호 “지정(至正) 8년” 이 직접 새겨져 있는 기년명 석탑입니다. 발원자로 강융·고용봉 등의 이름이 나오고, “원 황제와 태자, 황후의 만세를 기원한다”는 문구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고려 말의 정치 상황이 그대로 돌에 박제된 셈입니다. 원의 부마국이던 시기, 원 황실의 안녕을 비는 탑이 개성 근처에 세워졌습니다.

목조 건물을 돌로 옮겨 놓은 구조

구조도 특이합니다.

  • 기단 3단과 탑신 1~3층이 아(亞)자형 20면 평면 — 평면이 계단처럼 들쭉날쭉 튀어나온 형태입니다
  • 4층부터 10층까지는 일반적인 사각 평면으로 올라갑니다
  • 각 층의 기와지붕과 공포(栱包)까지 돌로 재현했습니다

돌을 쌓아 만든 탑이 아니라, 목조 건축물을 통째로 돌로 번역한 물건에 가깝습니다.

여기에 조각이 더해집니다. 기단부에는 현존 동아시아 최고(最古)의 서유기 조각이 있고(국립중앙박물관), 탑신에는 불회도 16면이 새겨져 있습니다. 삼장법사 일행이 돌에 새겨진 것이 14세기 고려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세조가 만든 쌍둥이

1467년 세조는 이 탑을 모델로 원각사지 십층석탑을 세웁니다. 지금 탑골공원에 있는 그 탑입니다. 두 탑은 형태가 매우 닮았고, 원각사지 탑도 대리석입니다. 그래서 원각사지 십층석탑 역시 지금은 유리 보호각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같은 재질이 같은 문제를 낳은 셈입니다.

1907년 2월 4일, 하루 만에 뜯겨 나갔다

이 탑의 이력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입니다.

1907년 1월,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특사로 조선에 옵니다. 그는 고종에게 이 탑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합니다. 그러자 골동상을 시켜 1907년 2월 4일, 무장 인력을 동원해 하루 만에 약 140개 부재로 해체한 뒤 우마차로 실어 반출합니다. 이후 “고종이 하사했다”는 명목이 붙었지만, 이는 거짓으로 확인됐습니다.

신문 기사 하나가 되찾은 탑

그런데 이 사건은 묻히지 않았습니다.

  • 1907년 3월 7일 — 영국인 베델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가 다나카를 실명으로 폭로합니다.
  • 헐버트가 현장을 직접 답사해 해외 언론에 알립니다.
  • 소식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까지 전해집니다.
  • 조선총독 데라우치와 하세가와의 반환 요구를 거쳐, 1918년 11월 15일 탑은 해체된 상태 그대로 돌아옵니다.

언론 캠페인으로 환수된 최초급 사례입니다. 빼앗긴 것도 기록(하루 만의 해체와 반출 경위)이 남았기에 알려졌고, 되찾은 것도 기록(신문 보도)이 해낸 일이었습니다. 명문이 새겨진 탑이라는 점과 묘하게 겹칩니다.

돌아온 탑은 경복궁에 약 40년간 방치됐다가 1960년에야 복원됩니다. 그리고 앞서 본 것처럼, 그 야외 40년이 다시 10년의 보존처리를 부르게 됩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 기단 — 아(亞)자형 20면 평면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단정하면 안 되는 것들

이 탑을 다룰 때 흔히 단정형으로 쓰이지만 실제로는 확정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 “원나라 장인이 만들었다” — 원 기술자 파견설과 고려 장인설이 병존하는 논쟁 사안입니다. “원 양식의 영향 아래”까지가 안전한 서술입니다.
  • “기황후의 탑” — 여러 설 중 하나일 뿐입니다.
  • 반출 인부 “200명” — 자료마다 숫자가 다릅니다. “무장 인력을 동원해”까지만 말할 수 있습니다.
  • “국내 최초 레이저 클리닝” — 특허 문서에 언급될 뿐 공식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 다나카의 방한 명목은 “순종 가례 특사”가 우세하지만 자료가 갈립니다.

참고 자료

관련 영상

유튜브 채널 「옛것의 과학」에서 다른 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요

저는 이 탑의 이력에서 1907년의 반출보다 1960년 이후의 야외 40년이 더 뼈아픈 대목이라고 봅니다. 빼앗긴 탑은 대한매일신보의 폭로 덕에 1918년에 돌아왔지만, 우리 손으로 경복궁에 세워 둔 세월 동안 산성비가 조각을 깎아 냈고 그걸 수습하는 데만 10년의 보존처리가 필요했으니까요. 대리석의 주성분이 산에 녹는 탄산칼슘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유물을 원래 자리에 둔다는 원칙보다 재질에 대한 이해가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탑을 실내로 들인 결정이 원칙을 꺾은 게 아니라 뒤늦게나마 화학을 인정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박물관에서 이 탑을 마주치신다면, 왜 돌탑이 지붕 아래 서 있는지부터 떠올려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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