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돌탑 하나를 풀었다가 다시 쌓는 데 20년이 걸렸습니다. 1999년 해체가 결정되고 2019년 4월 30일에 끝났으니 꼬박 20년, 투입된 예산은 225억 원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탑이 그냥 쌓아 올린 돌더미가 아니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100년 전에 부어 놓은 시멘트였습니다.
돌로 지은 나무집
풀어 보니 석재가 약 2,800개였습니다. 그런데 그 돌들이 단순히 위아래로 얹혀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기둥과 보와 서까래를 하나하나 돌로 깎아, 목수가 나무를 짜 맞추듯 결구해 놓은 구조였습니다. 목조건축의 부재 이름을 그대로 돌에 옮긴 셈입니다.
이것이 이 탑의 역사적 위치를 말해 줍니다. 백제는 원래 나무로 탑을 세우던 나라였습니다. 목탑은 화재와 부식에 약합니다. 더 오래 가는 재료로 옮겨 가려 할 때, 처음에는 알던 방식 그대로 새 재료를 다룹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건너가던 그 순간에 서 있는 탑입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합니다. 정림사지 탑은 목조 기법의 흔적을 남기면서도 부재가 정리되고 단순해져 있습니다. 미륵사지 → 정림사지의 순서로 보면, 돌이라는 재료에 맞는 표현을 찾아가는 과정이 읽힙니다.
1915년, 시멘트 185톤
해체가 오래 걸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이 탑은 오랜 세월에 한쪽이 무너져 내린 상태였습니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무너진 면에 시멘트를 들이부어 덮었습니다. 양은 약 185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붕괴를 막는다는 명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탑의 절반이 시멘트 덩어리 안에 갇혔습니다.
- 시멘트는 돌보다 단단하고, 석재와 강하게 붙습니다
- 기계로 깨면 안쪽 백제 석재가 함께 깨집니다
- 그래서 사람 손으로 조금씩 쪼아 떼어내는 작업이 첫 공정이 됐습니다
돌을 푸는 작업이 아니라 시멘트를 떼는 작업으로 몇 해를 보낸 것입니다. 보존한다는 판단이 100년 뒤 보존을 가장 어렵게 만든 사례로 자주 인용됩니다.
6층까지만 복원한 이유
복원은 6층까지만 했습니다.
원래 몇 층이었는지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9층 추정이 유력하지만 근거가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남아 있던 부재는 6층까지였고, 그 위를 추정으로 올리면 그때부터는 복원이 아니라 창작이 됩니다.
- 2층까지는 새 석재로 보강했습니다 — 하중을 받는 아래쪽이 가장 손상이 컸습니다
- 3층부터는 원래 석재를 다시 썼습니다
“왜 끝까지 올리지 않았나”는 질문이 자주 나오는데, 올리지 않은 것이 이 복원의 원칙입니다.
감사원이 지적한 것
2019년 완료 후 감사원 감사에서 지적이 나왔습니다. 언론에 보도된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 축석 방식과 구조 안정성에 대한 사전 검토가 부족했다
- 원형과 다르게 복원된 부분이 있다
20년과 225억이라는 규모를 생각하면 가볍게 넘길 지적은 아닙니다. 다만 이 사업이 놓인 조건도 함께 봐야 합니다 — 선례가 없는 규모의 석탑 해체였고, 시멘트를 떼어내는 동안 원래 부재의 상태가 계속 바뀌었으며, 층수조차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됐습니다.
이 사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결국 “복원은 어디까지가 복원인가” 라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무너진 그대로 두는 것, 확실한 데까지만 세우는 것, 추정으로 완성하는 것 — 셋 다 각각의 손실이 있습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2009년, 사리봉영기가 나왔습니다
해체 과정에서 예상 밖의 것이 나왔습니다. 1층 심주석에서 금제사리봉영기가 발견된 것입니다.
여기에 탑을 세운 해가 적혀 있었습니다 — 639년입니다. 그리고 발원자가 사택적덕의 딸, 즉 무왕의 왕후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널리 알려진 이야기와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서동요 설화가 실려 있고, 미륵사 창건도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전합니다. 그런데 정작 탑 안에서 나온 당대 기록에는 다른 인물이 적혀 있었습니다.
해석은 갈립니다.
- 선화공주 설화 자체가 후대의 이야기라는 견해
- 무왕에게 여러 왕후가 있었고 미륵사의 여러 탑을 각각 다른 이가 발원했다는 견해
- 사택왕후가 후비로 들어와 뒤에 발원했다는 견해
어느 쪽이든 당대의 금석문이 후대의 설화보다 무겁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디 있나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에 있습니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미륵사지 전체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로 세계유산에 올라 있습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탑입니다.
확인해 둘 것
- 원래 몇 층이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9층설이 유력할 뿐입니다
- 선화공주 설화가 “거짓으로 밝혀졌다”는 서술은 과합니다. 당대 기록과 후대 설화가 다르다는 것까지가 사실입니다
- 시멘트 양 185톤은 널리 인용되는 수치이며, 자료에 따라 편차가 있습니다
참고 자료
관련 영상
쇼츠 「돌탑인데 나무집처럼 짜맞췄습니다」 — 영상 업로드 후 링크 연결 예정
유튜브 채널 「옛것의 과학」에서 다른 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요
저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저평가된 대목이 6층에서 멈춘 결정이라고 봅니다. 20년과 225억 원을 들였으면 9층까지 완성해 보여주고 싶은 유혹이 컸을 텐데, 근거가 확정되지 않은 층수를 추정으로 올리는 순간 복원이 창작으로 바뀐다는 원칙을 지킨 셈이니까요. 오히려 1915년의 시멘트 185톤이야말로 “일단 완성된 모습으로 만들어 놓자”는 태도가 100년 뒤에 어떤 청구서로 돌아오는지 보여주는 반면교사라고 생각합니다. 감사원 지적처럼 이번 수리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지만, 저는 무너진 절반을 비워 둔 채 세운 지금의 모습이 탑의 역사까지 함께 보여주는 더 정직한 답이라는 쪽입니다. 사리봉영기의 639년 기록이 선화공주 설화를 흔든 것처럼, 확실한 것과 그럴듯한 것을 구분하는 태도가 이 탑을 둘러싼 모든 논쟁의 공통된 교훈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