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인데 벨 수가 없습니다.
곧은 칼몸 좌우로 가지가 세 개씩 엇갈려 뻗어 있어서, 날을 세워도 휘두를 수가 없는 형태입니다. 가지 여섯에 본체 끝을 더해 모두 일곱 갈래 — 그래서 칠지도(七支刀)입니다.
실전용이 아닙니다. 이 칼의 용도는 베는 것이 아니라 새기는 것이었습니다. 칼몸 앞뒤로 금빛 글자 61자가 박혀 있습니다.
홈을 파고 금을 밀어 넣는다 — 금상감
글자를 새긴 방법이 이 유물의 핵심입니다.
붓으로 쓴 것도, 주물을 뜰 때 함께 찍은 것도 아닙니다. 칼몸에 머리카락처럼 가는 홈을 먼저 파고, 그 안에 금실 또는 금박을 밀어 넣은 뒤 두드려 박았습니다. 금상감(金象嵌)이라고 부르는 기법입니다.
원리는 재료의 성질에 있습니다.
- 금은 무릅니다. 금속 중에서도 전성과 연성이 가장 좋아서, 두드리면 얇게 퍼지고 늘어납니다
- 홈 안에서 눌린 금은 좁은 틈 구석구석까지 퍼지며 홈 벽을 밀어냅니다
- 그 결과 접착제 없이 기계적으로 물립니다 — 홈이 금을 잡고, 퍼진 금이 홈을 잡습니다
납땜이나 도금이 아니라 끼워 물린 구조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붙인 것은 떨어질 수 있지만 물린 것은 그 형태가 무너져야 빠집니다.
철은 삭는데 금은 삭지 않는다
1600년이 지난 지금, 칼의 몸은 붉게 삭아 부스러졌습니다. 그런데 글자는 아직 금빛입니다.
이유는 화학입니다.
철은 산소와 물을 만나면 반응합니다. 산화철이 되고, 그 산화철은 표면에 단단히 붙어 있지 못하고 부스러져 떨어집니다. 떨어지면 아래의 새 철이 다시 드러나고, 다시 반응합니다. 녹이 안쪽까지 파고드는 이유입니다.
금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공기 중의 산소와도, 물과도, 대부분의 산과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덤에서 나온 금은 닦기만 하면 처음의 빛을 되찾습니다.
같은 칼 안에서 두 금속이 정반대로 늙은 셈입니다. 바탕은 삭아 내려앉고, 그 위에 박아 넣은 글자만 남았습니다.
61자 — 앞면 34자, 뒷면 27자
명문은 앞뒤로 나뉩니다.
| 면 | 글자 수 | 내용 |
|---|---|---|
| 앞면 | 34자 | 언제 만들었는가 |
| 뒷면 | 27자 | 왜 만들었는가 |
합쳐 61자입니다. 앞면은 제작 시점을, 뒷면은 제작 경위와 전달의 뜻을 적었습니다.
문제는 지금 또렷하게 읽히는 글자가 20여 자 남짓이라는 점입니다. 철이 삭으면서 상감이 함께 떨어져 나간 구간(박락)이 있고, 판독이 갈리는 글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판독 불능 구간에 이 유물의 최대 쟁점이 걸려 있습니다.
하사냐 헌상이냐 — 한 글자에 걸린 논쟁
칠지도를 둘러싼 논쟁은 “누가 누구에게 준 칼인가”입니다.
- 헌상설(일본 측 전통 해석): 백제가 왜왕에게 바친 칼이다
- 하사설(한국 측 다수 견해): 백제왕이 왜왕에게 내려 준 칼이다
근거가 갈리는 지점은 뒷면 명문의 어법입니다. 특히 “旨(지)” 자를 어떻게 읽느냐가 핵심으로 지목됩니다. 이 글자를 윗사람의 뜻을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표현으로 보면 하사가 되고, 달리 읽으면 해석이 달라집니다. 문장의 주어와 존비 관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방향이 뒤집히는 구조입니다.
여기에 『일본서기』의 관련 기록이 얹힙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왜에 칠지도를 바쳤다는 취지의 서술이 있는데, 이 문헌 자체가 후대에 정리되며 자국 중심으로 윤색된 대목이 많다는 점은 학계에서 널리 지적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근거로 삼는 순간 또 다른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 문제는 아직 평행선입니다. 명문의 결정적 구간이 판독되지 않는 한 어느 쪽도 상대를 논파하지 못합니다. 짧은 영상에서 다루지 않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 40초 안에 담으면 반드시 한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제작 연대도 두 학설이 있습니다
앞면에 적힌 연호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만든 시기가 달라집니다.
- 369년설 — 앞면의 “태화 4년”을 중국 동진의 연호로 보고 환산한 값입니다. 근초고왕 대에 해당합니다. 오래 통용된 견해입니다
- 408년설 — 백제 전지왕 대로 보는 견해입니다. 연호 판독과 서체를 근거로 제기됐습니다
영상에서 “1600년”이라고만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두 학설 어느 쪽을 택해도 대략 그 정도 시간이 흘렀지만, 특정 연도를 못 박으면 학설 하나를 편드는 셈이 됩니다.
단조냐 주조냐
만든 방법에도 이견이 있습니다.
- 단조설 — 철을 달궈 두드려 형태를 잡았다
- 주조설 — 거푸집에 부어 형태를 뜬 뒤 다듬었다
가지가 좌우로 뻗은 복잡한 형태를 두드려 만들 수 있는가, 반대로 주조한 철에 저렇게 가는 홈을 팔 수 있는가 — 양쪽 다 반론이 있습니다. 실물이 일본에 있고 파괴 분석이 어렵다는 점도 결론을 늦추는 요인입니다.
지금 어디 있나
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 에 있습니다.
이 신궁의 창고에 오래 보관되어 있다가 19세기 후반 명문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한국에는 실물이 없습니다. 국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국가유산청 사진 자료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백제가 만들어 바다 건너로 보낸 칼이 1600년 뒤 그쪽에 국보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확인해 둘 것
- 하사냐 헌상이냐는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한쪽을 사실처럼 쓰는 서술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 제작 연대도 확정이 아닙니다. 369년설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408년설이 함께 있습니다
- “칼몸에 금을 도금했다”는 표현은 틀립니다. 도금이 아니라 홈에 박아 넣은 상감입니다
- 단조/주조도 미결입니다
참고 자료
관련 영상
쇼츠 「벨 수 없는 칼에 금으로 61자를 새겼습니다」 — 영상 업로드 후 링크 연결 예정
유튜브 채널 「옛것의 과학」에서 다른 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요
저는 이 칼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대목이 하사냐 헌상이냐가 아니라 금상감이라는 선택 그 자체라고 봅니다. 철몸에 홈을 파고 금을 두드려 물린 사람은 결과적으로 1600년 뒤 바탕 쇠가 붉게 삭아도 글자만은 남는 구조를 만든 셈인데, 접착이 아니라 끼워 물리는 방식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하사설과 헌상설 논쟁은 61자 중 또렷이 읽히는 게 20여 자뿐이고 하필 旨 자 같은 결정적 구간의 판독이 갈리는 이상, 어느 쪽 손을 들어주는 글일수록 오히려 신뢰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국적 논쟁보다는, 백제 장인이 베지 못하는 칼에 굳이 금으로 글자를 박아 넣은 그 공정을 먼저 들여다보는 쪽이 이 유물을 제대로 읽는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이소노카미 신궁의 실물을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수록, 확정되지 않은 것을 확정된 듯 말하지 않는 태도가 더 중요해진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