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8월 15일 낮, 광복 50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 한복판에서 크레인이 거대한 석조 건물의 첨탑을 잘라냈습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던 멀쩡한 건물이었습니다. 그것도 나라가 축제처럼 부순 것입니다.
조선총독부 청사. 이 건물은 왜 하필 경복궁 앞에 서 있었고, 우리는 왜 반세기를 쓰고도 부수기로 했을까요. 그리고 이 건물을 둘러싸고 널리 퍼진 이야기들 — ‘하늘에서 보면 大日本 세 글자’, ‘전국의 쇠말뚝’ — 은 어디까지 사실일까요.

사진: 1929년 『조선박람회 기념사진첩』 수록, 위키미디어 커먼즈 (퍼블릭 도메인)
궁을 가린 건물 — 왜 경복궁이었나
1910년 나라를 삼킨 일제는 처음엔 남산 왜성대의 옛 통감부 건물을 총독부 청사로 썼습니다. 식민 통치의 심장부로 쓰기엔 좁고 낡은 목조 건물이었죠. 새 청사의 자리로 그들이 고른 곳은 조선 왕조 500년의 법궁 경복궁, 그것도 정문인 광화문 바로 안쪽이었습니다.
터를 닦는 방식이 교묘했습니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일제는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열었습니다. 통치 5년의 치적을 자랑한다는 명분이었죠. 행사장을 만든다는 이유로 궁궐 전각 4,000여 칸이 헐려 나갔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이 들어섰습니다. 박람회가 끝났을 때 궁은 이미 절반 넘게 비어 있었습니다.
공진회는 단순한 박람회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낙후함과 일제 통치의 ‘성과’를 나란히 전시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장치였고, 동시에 궁궐을 합법적으로 헐어내는 구실이기도 했습니다. 궁을 부수는 일과 통치를 선전하는 일이 하나의 행사 안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셈입니다.
이듬해인 1916년 7월 10일, 바로 그 자리에서 총독부 청사가 착공됩니다.
10년 공사, 675만 엔
공사는 꼬박 10년이 걸렸습니다. 1926년 완공된 청사는 지하 1층 지상 4층에 연건평 9,600여 평. 철근 콘크리트 뼈대에 벽돌로 벽을 채우고 외부를 화강암으로 마감한 뒤 꼭대기에 거대한 돔을 얹었습니다. 당시 일본 본토와 모든 식민지를 통틀어 가장 큰 건축물이자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습니다. 들어간 돈은 675만 1,982엔. 애초 예상은 5년에 300만 엔이었는데 기간도 비용도 두 배가 넘었습니다.
설계는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1912년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활동하며 여러 서양식 건축을 남긴 인물인데, 1914년 설계 도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총독부 건축과의 노무라 이치로 등 일본인 건축가들이 이어받아 완성했습니다. 설계가 여러 손을 거치며 돔의 형태를 비롯한 세부가 바뀌었고, 최종 결과물은 데 랄란데의 원안과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광화문은 왜 헐리지 않았나
새 청사가 완공될 무렵, 광화문은 청사를 가린다는 이유로 철거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곳에서 반대가 나왔습니다. 일본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사라지려 하는 조선의 건축을 애도하는 글을 발표했고, 이것이 일본 지식인 사회와 조선 여론을 함께 움직였습니다.
결국 광화문은 철거를 면하는 대신 1927년 경복궁 동쪽,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습니다. 자리를 옮긴 문은 더 이상 궁의 정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서울 어디에서도 경복궁은 보이지 않았고, 왕의 궁궐 앞을 식민 권력의 청사가 완전히 막아섰습니다.
검증 1 — 하늘에서 보면 大日本?
해방 뒤 이 건물을 두고 유명한 이야기가 퍼집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북악산은 큰 대(大) 자, 총독부 청사는 날 일(日) 자, 지금의 서울시청인 경성부청 건물은 근본 본(本) 자. 셋을 북에서 남으로 이으면 ‘대일본(大日本)’ 세 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일제가 조선의 정기를 누르려고 서울 땅에 제 나라 이름을 새겼다는 이야기죠. 여기에 1925년 남산에 세워진 조선신궁까지 엮어 일제가 서울의 풍수를 통째로 설계했다는 이야기로 커지기도 했습니다.
하나씩 뜯어보겠습니다.
총독부 청사가 위에서 보면 日자 모양인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이것은 건물 가운데에 안뜰(중정) 두 개를 두어 채광과 환기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당시 대형 관청 건축에서 유럽과 일본을 막론하고 두루 쓰이던 흔한 평면입니다. 전기 조명과 강제 환기 설비가 지금 같지 않던 시대에 깊은 평면의 건물에서 빛과 바람을 들이려면 중정을 파는 것 외에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경성부청 쪽 기록입니다. 경성부청 설계에 참여한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 사사 게이이치(笹慶一)는 1926년 잡지 《조선과 건축》에 이 건물의 평면을 설명하면서, 부지의 경계선에 맞춰 궁형(弓形), 즉 활 모양으로 했다고 적었습니다. 설계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 남긴 동시대 기록이 ‘본(本)’ 자가 아니라 ‘활 모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일제가 남긴 방대한 행정 문서 어디에서도 세 건물로 대일본을 형상화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조선총독부는 자신들의 치적을 선전하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고, 공진회처럼 노골적인 선전 행사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런 의도로 도시를 설계했다면 숨길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大日本 글자설은 사실이라기보다, 식민의 상처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검증 2 — 쇠말뚝은 누가 박았나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일제가 조선의 명산마다 쇠말뚝을 박아 지맥을 끊었다는 이른바 ‘혈침설’입니다.
이 이야기는 1990년대에 국가 사업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1995년 2월 15일 국무회의 결정으로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가 되었고, 내무부는 그해 2월부터 전국에서 쇠말뚝 118개를 제거했습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일제가 풍수를 목적으로 박았다는 증거가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혈침설을 주장하던 전문가들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뽑아낸 말뚝 상당수는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측량 기준점이거나 군사·통신용 시설물, 혹은 시기조차 특정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정부의 입장도 달라졌습니다. 1995년 4월 무렵의 정부 문서는 이 말뚝들이 반드시 일제강점기에 박힌 것은 아니며, 누가 박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정리하는 문화 사업으로 본다는 취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업의 명분이 ‘일제 잔재 청산’에서 ‘경관 정비’로 옮겨간 셈입니다.
총독부 청사를 철거할 때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건물 기초에서 나무 말뚝 9,388개가 무더기로 나온 것입니다. 지맥을 끊으려는 저주의 말뚝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무른 땅 위에 거대한 석조 건물을 세우기 위해 박은 지반 보강용 나무 파일이었습니다. 연약 지반에 말뚝을 촘촘히 박아 하중을 분산시키는 것은 지금도 고층 건물을 지을 때 쓰는 평범한 토목 공법입니다.
검증 3 — 축이 5.7도 틀어진 이유
총독부 청사가 경복궁의 남북 축과 어긋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차이는 약 5.7도입니다.
이 어긋남 역시 풍수적 의도로 해석되곤 했습니다만, 설명이 있습니다. 조선은 궁궐을 앉힐 때 나침반이 가리키는 자북(磁北)을 기준으로 삼았고, 일제는 근대 측량의 진북(眞北)을 기준으로 건물을 앉혔습니다. 진북과 자북 사이에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수 도의 편각이 생기는데, 그 차이가 대략 이만큼입니다.
덧붙이면 경복궁 자체도 정확한 정남향이 아닙니다. 조선의 궁궐 배치는 자북과 주변 지형을 함께 고려한 것이라, 현대 지도의 남북선과는 애초에 차이가 있습니다. 두 건물이 서로 다른 기준으로 세워졌으니 각도가 어긋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러나 남는 사실
그렇다면 풍수 침략은 전부 헛소문일까요. 여기서 이 이야기의 진짜 무게가 나옵니다.
말뚝과 글자는 전설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궁궐 전각 4,000여 칸을 헐어낸 것, 왕의 정문을 뜯어 옮긴 것, 조선의 공간 질서를 통째로 지우려 한 것 — 이것은 전설이 아니라 사진과 도면과 관보로 남은 사실입니다.
일제는 풍수라는 주술 대신 박람회와 건축과 도시계획이라는 근대의 도구로 같은 일을 해냈습니다. 미신을 걷어내도 남는 것은 충분히 무겁습니다. 오히려 근거 없는 이야기에 기대면, 문서로 증명되는 실제 훼손이 함께 흐려질 위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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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50년 — 이 건물의 또 다른 역사
1945년 해방이 왔지만 건물은 그대로였습니다. 오히려 대한민국 현대사가 이 건물 안에서 쓰이기 시작합니다.
- 1945년 9월 9일 미군이 진주해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청사로 사용
- 1948년 제헌국회가 이 건물에서 개원,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 1950년 6·25 전쟁 중 서울을 빼앗기고 되찾을 때마다 돔 위의 깃발이 바뀜. 9월 서울 수복 때 태극기를 올린 장면이 전쟁의 상징으로 남음
- 1962년 11월 22일 복구를 마치고 ‘중앙청’ 개청. 이후 30년 넘게 정부청사로 사용
- 1986년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
식민 지배의 사령부가 우리 유물을 품은 박물관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20년보다 긴 50년을 우리 손때가 묻은 채 서 있었습니다. 부수자는 쪽도 남기자는 쪽도 각자의 기억을 가진 건물이 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부술 것인가 남길 것인가 — 1990년대의 논쟁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철거 방침을 발표합니다.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경복궁을 복원한다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상징 사업이었습니다. 나라의 여론은 둘로 갈라졌고, 신문 지면과 방송 토론에서 몇 해에 걸쳐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철거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선의 법궁을 짓밟고 선 건물을 그대로 두는 것 자체가 치욕이다. 경복궁 복원은 이 건물을 걷어내야만 시작할 수 있다.
보존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치욕도 역사이며, 부숴서 지우면 교훈도 함께 사라진다. 부정적 유산일수록 남겨서 가르쳐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이전 복원론은 절충안이었습니다. 건물을 통째로 다른 곳에 옮겨 보존하자는 것인데, 석조 건물을 해체해 재조립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여기에 일본 건축학계가 총독부 청사를 아시아 근대 건축사에서 가치 있는 건축물로 평가하며, 경복궁 복원과 청사 보존을 함께 추진하는 방향으로 철거 계획을 재검토해 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했습니다. 당장 박물관이 소장한 유물 수십만 점을 어디로 옮길 것이냐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건물 하나를 두고 나라 전체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물은 셈입니다.
첨탑은 서쪽을 본다
정부는 철거를 택했습니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기념식에서 중앙 돔의 랜턴(첨탑) 해체를 시작으로 철거가 개시됐고, 1996년 11월 13일 지상 부분의 철거가 모두 끝났습니다.
폭파로 한순간에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1년 넘게 조각조각 해체한 방식이었습니다. 덕분에 첨탑과 기둥, 처마 부재 등이 온전히 남아 따로 보관될 수 있었습니다.
잘려 나간 첨탑은 지금 천안 독립기념관의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에 있습니다. 전시 방식이 의미심장합니다. 첨탑은 지하 5m 깊이에 반쯤 파묻힌 채, 해가 지는 서쪽을 바라보도록 놓였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있던 것을 가장 낮은 곳에 묻고, 지는 해를 향하게 한 것 —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과 식민 잔재의 청산을 공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첨탑 주변에는 함께 뜯어낸 기둥과 석재들이 흩어진 채 전시돼 있습니다. 철거 그 자체가 하나의 전시가 된 셈이죠.
총독부가 서 있던 자리에는 흥례문 권역이 복원됐고, 광화문도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 내 임시 청사를 거쳐 2005년 용산의 새 건물로 이전해 지금에 이릅니다.
풍수 미신은 사실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공간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한다는 것, 그것만은 일제도 우리도 똑같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궁궐 앞에 건물을 세웠고, 그래서 우리는 50년을 쓰고도 부순 것입니다.
다음에 광화문 앞을 지나거든 한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경복궁이 훤히 보이는 그 하늘이, 사실은 우리가 되찾은 자리라는 것을요.
참고 자료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 조선총독부 건물」
- 위키백과 「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
- 뉴스톱 팩트체크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 오마이뉴스 「일본제국주의 ‘쇠말뚝’ 미스터리」
- 민족문제연구소 「100년 전, 경복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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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은요
저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대목이 쇠말뚝 118개를 뽑고도 풍수 목적의 증거를 끝내 찾지 못한 1995년의 조사 결과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大日本 글자설이나 혈침설이 깨지면 일제의 잘못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끼지만, 저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궁궐 전각 4,000여 칸을 박람회라는 합법적 절차로 헐어낸 쪽이 쇠말뚝 몇 개보다 훨씬 치밀하고 무서운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미신에 기대 분노하면 반박당하는 순간 분노의 근거까지 함께 무너지지만, 사진과 도면으로 남은 훼손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총독부 청사를 기억하는 올바른 방법은 소문을 믿는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 증명되는 사실을 정확히 아는 쪽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