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1975년, 경주 동궁과 월지(사적, 2011년 7월 ‘안압지’에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서쪽 호안 석축 바닥에서 참나무로 깎은 물건 하나가 나왔습니다.
면이 열네 개입니다. 정사각형 여섯 면 + 육각형 여덟 면.
이름은 주령구(酒令具), “술자리에서 명령을 내리는 도구”라는 뜻입니다. 유물 고유의 이름이 아니라 용도를 보고 붙인 이름입니다.
어떻게 열네 면이 나오나
정육면체를 떠올려 보십시오. 면이 여섯, 꼭짓점이 여덟입니다.
꼭짓점 여덟 개를 비스듬히 잘라내면 잘린 자리마다 새 면이 하나씩 생깁니다. 8개가 늘어납니다. 그리고 원래의 정사각형 여섯 면은 모서리가 깎여 작아진 채로 남습니다.
6 + 8 = 14면. 육팔면체 계열의 형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형태가 특별한 설계의 결과가 아니라, 꼭짓점을 잘라내면 자연히 나오는 형태라는 점입니다. 이 사실은 뒤에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두 면의 면적이 거의 같다
실측치를 보면 이렇습니다.
| 면 | 치수 | 면적 |
|---|---|---|
| 정사각형 (6면) | 2.5 × 2.5cm | 6.25㎠ |
| 육각형 (8면) | 긴 변 2.5cm, 짧은 변 0.8cm | 6.265㎠ |
차이가 0.015㎠, 약 0.24퍼센트입니다. 거의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대부분의 소개 글이 이렇게 끝납니다. “그래서 열네 면이 나올 확률이 1/14로 균등하도록 과학적으로 설계된 주사위다.”
그런데 이 문장은 검증된 적이 없습니다.
면적이 같다고 확률이 같지는 않다
유완석·이정한, 「주령구에서 육각면이 나올 확률에 대한 운동역학적 해석」(『대한기계학회논문집 A권』 41-11, 2017)이 이 통설을 직접 검증했습니다.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 실물 굴리기 실험
- 다물체동역학 시뮬레이션
결과는 이렇습니다. 마찰계수에 따라 확률이 달라집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합니다. 주사위가 어느 면으로 서는지는 면적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 면의 모양 — 정사각형과 육각형은 굴러가다 멈출 때 걸리는 방식이 다릅니다
- 무게중심과 관성모멘트 — 어느 축으로 잘 도는지가 다릅니다
- 바닥의 성질 — 마찰이 크면 덜 구르고, 작으면 더 구릅니다
면적은 정적인 값이고, 주사위가 서는 것은 동적인 과정입니다. 이 둘 사이에 자동으로 성립하는 등식은 없습니다. 장대흥(2005), 왕문옥 외(2005) 등의 선행 연구도 이 문제를 다뤄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신라 장인이 확률을 계산해서 깎았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앞서 본 것처럼 꼭짓점을 잘라내면 자연히 나오는 형태라, 면적이 비슷해진 것이 의도인지 우연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이 유물이 시시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1300년 전에 확률을 계산했다” 보다 “면적은 거의 같은데 확률은 아직 아무도 증명하지 못했다” 가 더 오래 남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열네 면에 적힌 벌칙
이 주사위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는 각 면의 명문이 말해 줍니다. 술자리 벌칙입니다.
| 명문 | 뜻 |
|---|---|
| 삼잔일거(三盞一去) | 석 잔을 한 번에 마시기 |
| 곡비즉진(曲臂則盡) | 팔을 구부려 다 마시기 — 이른바 러브샷 |
| 농면공과(弄面孔過) | 얼굴을 간질여도 꼼짝 않기 |
| 중인타비(衆人打鼻) | 여러 사람이 코를 두드리기 |
| 금성작무(禁聲作舞) | 소리 없이 춤추기 |
| 자창자음(自唱自飮) | 스스로 노래하고 마시기 |
1300년 전 연회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얼굴을 간질여도 웃지 않기, 음악 없이 춤추기 — 지금 해도 통할 벌칙들입니다.
다만 명문 중 自唱怪來晩(자창괴래만)의 괴래만과 月鏡(월경)은 당시 유행가 제목으로 추정될 뿐 실체가 전하지 않습니다. 괴래만의 뜻도 두 갈래 해석이 있습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진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유물의 가장 아픈 대목입니다.
발굴 후 보존처리 과정에서 건조 장비가 과열돼 타 버렸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복제품입니다.
땅속 연못 바닥에서 1300년을 버틴 나무가, 꺼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진 것입니다. 물에 잠겨 있던 목재는 공기 중에서 급격히 변형되기 때문에 수분을 서서히 빼내는 처리가 필수인데, 그 과정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경위 설명은 자료마다 갈립니다. 레인지 오작동, 전압 과부하, 오븐 자동조절장치 고장 등으로 전해집니다. 어느 것이 맞는지 확정된 서술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그대로 적어 두는 편이 정확합니다. 영문 위키의 “전자레인지” 서술은 한국 측 자료와 어긋나고 재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건조 장비 과열”까지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록이 유물을 대신했다
그런데 복원이 가능했습니다. 소실 전에 여러 각도의 사진과 각 면의 실측치를 기록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주사위의 면적을 비교하고 확률을 논할 수 있는 것도, 2017년 연구자가 시뮬레이션을 돌릴 수 있었던 것도 그 기록 덕분입니다. 유물은 사라졌지만 데이터는 남았습니다.
참고로 함께 나온 상아 정육면체 주사위는 원본이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재질이 달랐던 것이 갈림길이 됐습니다.
국보가 아닙니다
간혹 “국보였다”고 적힌 글이 있는데, 주령구는 국가지정문화유산이 아닙니다. 진품이 소실됐기 때문입니다. 지정 대상이 되려면 실물이 있어야 합니다.
출토 연도도 종종 1971년으로 적히는데, 1971년은 경주관광개발계획이 시작된 해입니다. 발굴은 1975~76년입니다.
2025년, 50년 묵은 통설이 흔들렸다
이 유물에는 오랫동안 “신라 태자가 주색에 빠져 놀던 도구”라는 이야기가 따라붙었습니다. 동궁이 태자의 공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25년, 월지 동편에서 별도의 태자궁 구역이 확인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주령구가 나온 서쪽은 왕의 공간으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서 왕이 신료와 귀빈에게 연회를 베푼 기록이 여럿 남아 있습니다 — 혜공왕 5년, 헌안왕 4년, 헌강왕 7년, 경순왕 5년. 국왕의 공식 연회 공간이었다는 뜻입니다.
같은 유물이 “방탕한 태자의 놀이기구”에서 “국왕 연회의 의례 도구”로 성격이 바뀐 셈입니다. 50년 된 이야기가 발굴 하나로 흔들렸습니다.
언제 만들어졌나
제작 시기는 8세기 이전 통일신라입니다. 근거는 상대연대입니다. 경덕왕~혜공왕대(747~774)의 목간이 나온 토층보다 아래에서 발견됐습니다. 아래 있으면 먼저 묻힌 것입니다.
크기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 직경 4.7cm, 높이 약 4.8cm, 직경 약 5cm 등. 확정된 단일 수치가 없어 이 글에서는 치수를 단정하지 않았습니다(면적 실측치는 각 면의 변 길이 기준입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 이 글의 사진은 주령구가 출토된 경주 동궁과 월지입니다. 주령구 진품은 소실돼 국가지정문화유산이 아니므로 공공누리 제1유형 사진이 없습니다.
참고 자료
-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안압지 출토 14면체 주사위 — ※ ‘삼각형 8면’ 오류가 포함된 자료입니다
- 한국문화재재단 전통문화포털, 주령구
- 유완석·이정한, 「주령구에서 육각면이 나올 확률에 대한 운동역학적 해석」, 대한기계학회논문집 A권 41(11), 2017
- 장대흥, 「14면 주사위에 대한 재고찰」, 응용통계연구, 2005
- 경향신문 이기환, 「신라 태자는 주색잡기에 빠졌다?…’태자궁’ 출현에 풀린 ’50년 오해’」, 2025-02-25
- 삼국사기,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다 (한국 고대 사료 DB)
관련 영상
쇼츠 「면적은 맞췄는데 확률은 아무도 증명 못 했습니다」 — 영상 업로드 후 링크 연결 예정
유튜브 채널 「옛것의 과학」에서 다른 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요
저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대목이 “면적 차이 0.24퍼센트”라는 숫자 자체가 아니라, 그 숫자를 남긴 기록이라고 봅니다. 진품이 건조 장비 과열로 타 버렸는데도 2017년에 마찰계수까지 따지는 시뮬레이션이 가능했던 건, 소실 전에 찍어 둔 사진과 실측치 덕분이었으니까요. 흔히 “1300년 전에 확률을 계산한 과학 주사위”라는 쪽이 더 매력적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저는 검증되지 않은 찬사보다 “면적은 거의 같은데 확률은 아직 아무도 증명하지 못했다”라고 정직하게 적는 쪽이 이 유물을 더 오래 살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2025년 태자궁 발굴로 50년 묵은 “방탕한 태자” 이야기가 흔들린 것처럼, 유물에 붙은 그럴듯한 서사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지만 치수와 명문 같은 데이터는 그대로 남습니다. 결국 주령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건 신라의 확률 계산이 아니라, 실물이 사라져도 기록이 유물을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