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 암각화 — 선 몇 개로 고래 종을 가려낸 그림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 대곡천 절벽의 암면 전경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울산 울주군 대곡천 절벽에 너비 약 8미터, 높이 약 3미터의 바위면이 있습니다. 여기에 300점이 넘는 그림이 새겨져 있고, 그중 고래만 50마리 이상입니다.

선 몇 개가 전부인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고래의 종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최소 일곱 종이 확인됐습니다 —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 향고래, 들쇠고래, 범고래, 상괭이(울산암각화박물관 공식).

무엇을 보고 종을 가르나

울산암각화박물관과 국가유산청이 제시하는 판별 근거는 네 가지입니다. 분기(물기둥)의 형태, 머리와 입 모양, 몸통 형태, 가슴지느러미 묘사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새겨진 특징실제 해부학적 근거
북방긴수염고래머리에 양쪽으로 갈라진 고리 문양 = V자 물기둥, 등지느러미 없음분수공이 둘로 벌어져 있어 물기둥이 V자로 갈라진다. 등지느러미가 실제로 없다
혹등고래복부 주름이 항문까지 이어짐배주름(ventral pleats)이 배꼽 너머까지 길게 뻗는다
귀신고래몸통 주름이 2~7개뿐다른 수염고래류는 주름이 수십 개인데 귀신고래는 2~7개로 뚜렷이 적다

주름의 개수와 물기둥의 갈래 — 그림에서 선을 몇 개 긋느냐가 곧 종의 이름이 되는 셈입니다.

국립수산과학원 연구원들이 분기 형태와 부위 비율을 실제로 측정해 대조했고, 식별된 종이 한반도 근해에 실제로 서식하는 종임을 확인했습니다. 상상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본 것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물기둥을 그리려면 숨 쉬는 순간을 봐야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고래의 물기둥은 고래가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내쉬는 그 순간에만 보입니다. 몇 초짜리 장면입니다. 그 순간의 물기둥 모양이 종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려면, 여러 번 보고 비교해야 합니다.

배 주름의 개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래가 몸을 뒤집거나 배를 드러내는 순간에만 셀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공식 평가가 이 지점을 짚습니다.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사실적인 그림

사냥의 기록 — 배, 작살, 부표

이 암면에는 고래만 있는 게 아닙니다.

  • 배에 17명, 7명, 5명이 탄 장면이 각각 새겨져 있습니다
  • 작살, 부구(부표), 그물이 함께 표현돼 있습니다

부표는 특히 의미가 큽니다. 작살을 맞은 고래가 물속으로 도망가면 놓칩니다. 부표를 연결해 두면 고래가 잠수해도 위치를 알 수 있고, 고래가 지칠 때까지 저항을 만들어 냅니다. 이건 단순한 사냥이 아니라 기술입니다.

“주운 고래일 뿐”이라는 반론과, 그것을 뒤집은 뼈

오랫동안 회의론이 있었습니다. 신석기인이 정말 고래를 사냥했겠느냐, 해안에 좌초한 고래를 수습해 쓴 것을 그린 게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Bong W. Kang의 2020년 논문(Journal of Anthropological Research)이 이 회의론을 명시적으로 다룹니다.

그런데 2010년, 울산 황성동 신석기 유적에서 결정적인 물증이 나왔습니다.

  • 작살촉이 박힌 고래 뼈
  • 시기는 기원전 4000~3000년
  • 작살촉은 사슴뿔을 갈아 만든 것

좌초한 고래에는 작살이 박혀 있지 않습니다. 이 뼈는 신석기 포경을 보여주는 동아시아 첫 사례이고, 2026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그림이 말하던 것을 뼈가 증명한 셈입니다.

반구대 암각화 고래 그림 — 쪼아 새긴 고래 형상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크리스마스에 발견됐다

발견 경위도 기록해 둘 만합니다.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 조사단(문명대·이융조·김정배)이 인근 천전리 각석을 조사하던 중 주민 제보로 이 암면을 확인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찾은 셈입니다. 국보로는 1995년 6월 23일 지정됐습니다.

참고로 “국보 제285호”라고 쓰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2021년 11월 19일부터 국가지정문화유산의 지정번호 표기가 폐지됐습니다. 번호는 지정 순서일 뿐 서열이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유네스코 등재 — 이름이 「반구천의 암각화」인 이유

2025년 7월 12일, 제4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가 확정됐습니다. 한국의 17번째 세계유산이고 등재번호는 1740입니다.

여기서 자주 혼동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등재된 이름은 「반구천의 암각화」(Petroglyphs along the Bangucheon Stream)입니다. “반구대 암각화”가 아닙니다.

구성 유산이 두 곳이기 때문입니다.

  •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 고래와 사냥 장면
  •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 기하학 무늬와 신라 시대 명문

같은 대곡천 물줄기를 따라 있는 두 유적을 하나의 유산으로 묶은 것입니다. 그래서 “반구대 암각화가 세계유산이 됐다”는 표현은 구성 관계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합니다.

등재 기준은 (i) 인류 창의성의 걸작(iii) 문화적 전통의 독보적 증거 두 가지입니다. 위원회는 “다양한 고래와 고래잡이의 주요 단계를 담은 희소한 주제”라고 평가했습니다.

2010년 잠정목록에 오른 뒤 등재까지 15년이 걸렸습니다. 가장 큰 걸림돌이 다음 문제였습니다.

해마다 40일씩 물에 잠긴다

1965년 준공된 사연댐 때문입니다. 저수 수위가 53미터를 넘으면 암면이 부분적으로 잠기기 시작하고, 57미터가 되면 전체가 수몰됩니다.

시기연평균 침수 일수
2005~2013년151일
최근38~40일

바위에 새긴 그림이 1년에 한 달 넘게 물속에 있다가 나오기를 반복합니다. 젖고 마르기를 되풀이하면 암면은 빠르게 상합니다.

대책으로 사연댐에 여수로 수문 3개를 설치하는 사업이 진행 중입니다. 수위를 낮게 관리해 침수를 연 1일 이내로 줄이는 것이 목표이고, 2030년 완공을 목표로 합니다. 사업비는 647억 원에서 809억 원으로 늘었습니다.

세계유산위원회도 등재하면서 사연댐 사업의 진척 상황을 보고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등재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관리 의무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국가유산청장은 수문이 완공된 뒤에도 제 역할을 할지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울산의 식수 문제와 얽혀 있어 수위 관리가 계획대로 될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곡천과 반구대 암면 — 수위에 따라 잠기는 아래쪽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들

이 유적에 대해 자주 단정형으로 쓰이지만 실제로는 열려 있는 문제들입니다.

  • 제작 시기 — 학계 합의가 없습니다. 1980년 최초 편년은 청동기~초기철기였고, 지금은 신석기설(강봉원·하인수)이 우세하지만 청동기설(김권구)도 있습니다. “7,000년 전”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신석기에서 청동기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가 정확합니다.
  • 그림 개수 — 조사마다 늘어났습니다. 1984년 191점 → 2013년 307점 → 박물관 현행 312점 → 2018년 울산대 353점. 암면의 상태와 조사 기법에 따라 새로 확인되는 그림이 계속 나옵니다. “300점이 넘는다”가 안전한 표현입니다.
  • 고래 종 수 — “11종”이라는 서술은 장석호 박사의 개별 발표(67점 11종)입니다. 박물관 공식은 최소 7종입니다.
  • “세계 최초의 포경 유적” — 유네스코 공식 문안은 최상급을 쓰지 않고 “세계 암각화에서 드물게 표현된 주제”라고만 합니다. “가장 이른 고래사냥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정도가 맞습니다.
  • “귀신고래는 새끼를 업고 다닌다” — 상시 습성이라는 학술 근거가 없습니다. 기록된 것은 등타기, 수면 위로 들어올리기, 포식자 방어 같은 상황적 행동입니다. 갓 난 새끼도 4.5미터에 500킬로그램이 넘어 “업고 다닌다”는 표현 자체가 대중적 의역입니다.

참고 자료

관련 영상

유튜브 채널 「옛것의 과학」에서 다른 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요

저는 이 글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유네스코 등재보다 사연댐 쪽이라고 봅니다. 물기둥이 V자로 갈라지는 몇 초를 잡아낸 관찰력이 수천 년을 버텨 왔는데, 정작 그 바위가 지금도 해마다 38~40일씩 물에 잠긴다는 사실은 등재 소식에 가려 잘 언급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등재 기준이나 명칭 논란보다 2030년 수문 완공이 실제로 지켜지는지가 이 유산의 운명을 가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황성동에서 나온 작살촉 박힌 고래 뼈처럼 그림의 신빙성을 뼈가 뒷받침해 준 사례는, 우리가 “선사시대 그림”을 얼마나 쉽게 상상화로 깎아내려 왔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저는 이 암각화를 예술품이기 이전에 수백 번의 관찰이 쌓인 기록물로 읽는 쪽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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