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1966년 9월,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을 노린 도굴 시도가 있었습니다. 도굴꾼들은 탑을 들어 올리려다 실패하고 달아났지만, 그 과정에서 탑신이 흔들려버렸습니다. 이를 수리하기 위해 이듬해 10월 탑을 해체하던 중, 2층 탑신의 사리공에서 뜻밖의 유물이 발견됩니다. 폭 약 8cm, 길이 약 620cm의 두루마리 — 지금은 국보로 지정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입니다.
탑 속에 함께 봉안된 것들
신라인들은 탑을 세울 때 몸돌 안쪽에 사리와 경전을 함께 모시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석가탑 사리공에서도 다라니경과 함께 금동제 사리외함, 사리병 등 여러 사리장엄구가 함께 나왔습니다. 다라니경은 나무판에 글자를 새기고 먹을 묻혀 종이에 찍어낸 목판 인쇄물로, 세로로 긴 두루마리 형태입니다. 불국사 삼층석탑이 751년 무렵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다라니경도 그 이전에 인쇄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현존하는 목판 인쇄물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합니다. 오랫동안 최고(最古) 인쇄물로 꼽혀 온 일본의 백만탑다라니(770년 완성)보다 최소 20년가량 앞선다는 근거입니다. 특히 본문에 측천무후 시기(690~705년)에만 쓰인 특수한 한자, 이른바 무주제자(武周制字)가 포함돼 있어 8세기 초 제작으로 보는 근거가 됩니다.
다만 모든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탑을 중수한 기록(1024년, 1038년)이 남아 있어 고려 시대에 다시 봉안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설도 있고, 국내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중국에서 인쇄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해외 연구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最古)”라는 표현은 항상 “~로 평가된다”는 조건과 함께 쓰이는 것이 정확합니다.
1200년을 버틴 한지
다라니경이 지금까지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종이 자체의 내구성도 한몫합니다. 닥나무 섬유로 만든 전통 한지는 산성화가 더딘 편이라 오랜 세월에도 쉽게 삭지 않습니다. 1200년 넘게 탑 속 밀폐된 공간에 있었다는 특수한 보존 조건도 있었지만, 한지의 내구성을 실증하는 사례로도 자주 언급됩니다.
마치며 — 우연히 세상에 나온 천년의 기록
도굴꾼들이 탑을 흔들지 않았다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지금도 탑 속에 잠들어 있었을지 모릅니다. 도난 시도라는 뜻밖의 사건이 인쇄 문화사에서 손꼽히는 발견으로 이어진 셈입니다. 현재 이 유물은 불국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 보관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