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부일구의 과학 — 글자 없이 읽는 조선의 공중 시계

앙부일구 — 오목한 반구형 청동 해시계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15세기 조선에서 시계는 왕과 관청만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종은 이 시계를 사람이 가장 많이 오가는 길 한복판에 내놨습니다. 그것도 글자를 몰라도 읽을 수 있는 시계로요. 가마솥을 닮은 이 해시계, 앙부일구의 원리를 하나씩 뜯어보겠습니다.

왜 오목하게 팠을까

앙부일구는 이름부터가 설계를 설명합니다. ‘앙부(仰釜)’는 하늘을 우러르는 가마솥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반구 모양으로 움푹 파인 안쪽에 시각을 읽는 눈금이 새겨져 있습니다.

평평한 해시계는 만들기는 쉽지만 해가 낮게 뜨는 아침·저녁에는 그림자 선 간격이 지나치게 벌어져 읽기가 부정확해집니다. 반면 오목한 반구 형태는 하루 종일 그림자 간격이 비교적 고르게 유지돼 읽기가 안정적입니다. 여기에 바늘(영침)을 북극(하늘의 축) 방향으로 위도에 맞춰 비스듬히 꽂아, 그림자가 계절과 시각에 따라 정확한 궤적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시계이자 달력

앙부일구의 눈금은 두 방향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세로선은 시각을, 가로선은 절기를 나타냅니다. 해가 뜨고 지면서 바늘 그림자가 반구 안쪽을 지나가는데, 그림자 끝이 어느 세로선을 지나느냐로 몇 시인지, 어느 가로선을 지나느냐로 지금이 어느 절기인지를 동시에 읽을 수 있습니다.

앙부일구 내부 눈금 클로즈업 — 시각과 절기를 나타내는 세로선·가로선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하나의 기구로 시계와 달력 역할을 동시에 하는 셈입니다. 농사와 제사, 행정 업무 모두 절기에 크게 좌우되던 시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정보를 한 화면에서 동시에 읽게 만든 설계는 실용성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길 한복판에 놓인 시계

앙부일구가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설치 장소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6년(1434년) 10월 2일 기사에 따르면, 세종은 이 해시계를 종묘 앞과 혜정교(지금의 종로 일대) 두 곳에 설치했습니다. 궁궐이나 관청 안이 아니라, 백성이 오가는 길가였습니다.

시간을 재는 기구가 왕실과 관청의 전유물이던 시대에, 누구나 지나가다 시각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든 이 시도는 조선 최초의 공중(公衆) 시계로 꼽힙니다.

글을 몰라도 읽을 수 있게 — 12지신 그림

앙부일구를 길가에 세운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백성이 대다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종은 시각을 숫자나 한자 대신 쥐·소·호랑이 같은 12지신 동물 그림으로 새기게 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이를 두고 “어리석은 백성이 시각을 알지 못하므로” 그림으로 표시했다는 취지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시간을 아는 것이 곧 권력이던 시대에, 그 권력을 문맹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나눠 가질 수 있게 만든 셈입니다.

세종 대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아쉽게도 1434년 세종 때 처음 만든 앙부일구 원본은 지금 전하지 않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유물들은 대부분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에 다시 제작된 것들로, 이 가운데 여러 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실용부터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며 조선 말기까지 계속 제작됐습니다.

원본은 사라졌지만, 오목한 반구에 시각과 절기를 함께 새기고 이를 길거리에 내놓았다는 발상 자체는 후대 제작본을 통해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치며 — 시간을 공공재로 만든 설계

앙부일구는 정밀한 관측 기구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쓸 수 있는 공공시설이었습니다. 오목한 반구로 정확도를 높이고, 그림으로 문맹의 벽을 없애고, 길거리에 세워 접근성을 확보한 것까지 — 세 가지 설계가 겹쳐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좋은 기술을 만드는 것과, 그 기술을 실제로 모두가 쓰게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이 해시계는 600년 전에 이미 보여준 셈입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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