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철쇄는 있었나 — 난중일기에 없는 쇠사슬, 기록에 남은 것은 물살이었다

해남 명량대첩비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명량해전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울돌목 양쪽에 쇠사슬을 걸어 두었다가, 일본 함선이 지나갈 때 끌어올려 배를 걸어 넘어뜨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난중일기에도, 선조실록에도 없습니다.

철쇄설은 어디서 왔나

1차 사료에 없는 이야기가 어떻게 정착했는지 계보를 따라가 보면 이렇습니다.

  • 『택리지』(1751) — 이중환이 쓴 인문지리서입니다. 명량해전으로부터 150여 년 뒤의 기록입니다. 울돌목에 쇠사슬을 걸었다는 서술이 여기에 나옵니다
  • 『현무공실기』 — 김억추의 행적을 기린 기록입니다. “철쇄와 철구로 적선을 부쉈다” 는 취지의 기술이 있습니다

두 문헌 모두 해전 당대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무공실기』는 특정 인물의 공적을 기리는 성격의 문헌이라 서술의 무게가 실록과는 다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철쇄는 없었다”가 아니라, “1차 사료에 기록이 없고 최초 출처가 150년 뒤의 문헌” 이라는 것까지가 확인된 사실입니다. 이 선을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주장입니다.

공학적으로 가능한 일이었나

울돌목의 조건을 놓고 보면 회의적인 지점들이 있습니다.

항목 값
해협 폭 약 300m
최대 유속 초당 약 5m

여기에 쇠사슬을 가로질러 걸었다고 가정하면 문제가 줄줄이 따라옵니다.

첫째, 장력입니다. 300m를 가로지르는 쇠사슬은 그 자체 무게만으로도 크게 처집니다. 처지지 않게 하려면 양 끝을 어마어마한 힘으로 당겨야 하는데, 그 힘은 사슬의 무게보다 훨씬 큽니다. 게다가 초속 5m로 흐르는 물이 사슬 전체를 계속 하류로 밀어냅니다.

둘째, 정박입니다. 그 장력을 받아 줄 고정점이 양안에 있어야 합니다. 바위에 박든 구조물을 세우든, 수백 톤급 힘을 견디는 정착부를 조수 간만이 큰 해안 양쪽에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 운용입니다. 물속에 가라앉혀 두었다가 원하는 순간에 끌어올리려면 그 무게를 들어 올릴 동력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규모가 아닙니다.

넷째, 시간입니다. 칠천량 패전 이후 조선 수군에게 주어진 시간과 인력, 자재를 생각하면 이런 규모의 토목 공사를 준비할 여유가 있었는지 의문이 남습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 — 물살

철쇄가 사료에 없는 대신, 울돌목의 물살은 분명히 있습니다.

울돌목(鳴梁)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것입니다. “우는 돌목” — 물이 좁은 목을 빠져나가며 내는 소리가 울음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좁은 해협에 큰 물이 몰리면 소용돌이가 생기고,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립니다.

이 해협은 반일주조(半日周潮) 체계에 놓여 있습니다. 하루에 두 번 밀물과 썰물이 오가며 방향이 뒤집힌다는 뜻입니다.

2010년, 그날의 조류를 재현하다

국립해양조사원이 400여 년 전 해전 당일의 조류를 추정해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울돌목에 수평 초음파 유속계를 설치해 6개월간 장기 관측을 하고, 그 자료로 조석 성분을 분해한 뒤 해전 당일로 역산했습니다. 조석은 천체 운동에 따르는 주기적 현상이라 충분한 관측 자료가 있으면 과거로 되돌려 계산할 수 있습니다.

결과로 나온 그날의 흐름입니다.

시각 조류
오전 6시 30분경 북서 방향 창조류 시작
오전 10시 10분경 초당 약 4m로 최고
낮 12시 21분경 남동 방향 낙조류로 급변

오전 내내 한 방향으로 흐르던 물이 정오 무렵 방향을 뒤집습니다. 좁은 해협에 들어와 있던 함대에게 이 반전은 대열 자체를 무너뜨리는 조건입니다. 노를 젓든 돛을 쓰든, 배가 서로 밀리고 부딪치기 시작합니다.

조선 수군은 13척, 일본 수군은 133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133척 전부가 좁은 목 안에서 교전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해협의 폭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수의 우위가 지형에서 무력화되는 구조였습니다.

다만 이순신이 이 반전 시각을 “계산했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확인 가능한 선은 그 지역의 물때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활용했다는 데까지입니다. 조수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과 지역민의 지식이 근거였을 것입니다.

왜 사료가 적은가

정유재란 시기의 기록은 임진년 초기에 비해 성글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조정이 여러 차례 옮겨 다녔고, 이순신 본인도 파직과 백의종군을 거치며 기록의 연속성이 끊긴 구간이 있습니다. 난중일기 자체도 결본이 있습니다.

기록이 적다는 것은 “없었다”의 증거가 아니지만, 후대의 이야기가 빈자리를 채우기 쉬운 조건이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철쇄설이 자리 잡은 배경에는 이런 사정도 있습니다.

같은 물살을 지금은 전기로 씁니다

울돌목의 빠른 조류는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이곳에는 조류발전 설비가 설치되어 조류의 운동에너지로 전기를 만듭니다. 댐을 쌓아 물을 가두는 조력발전과 달리, 흐르는 물에 터빈을 담가 돌리는 방식입니다.

400년 전 함대를 무너뜨린 물살이 지금은 발전기를 돌립니다. 지형은 변하지 않았고, 쓰는 방법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지금 어디 있나

울돌목은 전남 진도군과 해남군 사이, 진도대교 아래입니다. 다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것이 보입니다.

해남에는 명량대첩비(보물)가 있습니다. 해전의 전말을 새긴 비석으로,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옮겨졌다가 광복 후 되찾아 세운 이력이 있습니다.

확인해 둘 것

  • “철쇄는 없었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1차 사료에 기록이 없다는 것까지가 사실입니다
  • 이순신이 조류 반전 시각을 계산했다는 서술은 과합니다. 물때를 알고 활용했다는 것까지가 안전합니다
  • 일본 함선 133척이 모두 교전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해협 폭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참고 자료

관련 영상

쇼츠 「울돌목 쇠사슬은 없었습니다. 무기는 물이었죠」 — 영상 업로드 후 링크 연결 예정

유튜브 채널 「옛것의 과학」에서 다른 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요

저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저평가된 대목이 쇠사슬의 유무가 아니라 2010년 국립해양조사원의 역산 작업이라고 봅니다. 6개월 관측 자료로 400년 전 그날 낮 12시 21분경의 조류 반전까지 되짚어낸 것인데, 극적인 철쇄 논쟁에 가려 이 성과 자체가 잘 언급되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반대로 과대평가된 쪽은 “이순신이 반전 시각을 계산했다”는 식의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폭 300m에 초속 5m 물살이라는 조건만 놓고 봐도 물때를 알고 버틴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일이지, 굳이 계산 천재 서사를 얹을 필요가 없습니다. 기록에 없는 쇠사슬보다 기록으로 복원 가능한 물살이 더 극적이라는 것, 저는 그게 이 이야기의 진짜 결론이라고 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