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정전 박석 — 깨서 캔 것이 아니라 벗겨 낸 돌

경복궁 근정전과 앞마당 — 박석이 깔린 조정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에 서면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임금이 서던 자리인데 바닥돌이 반듯하지 않습니다. 크기가 제각각이고 표면도 거칩니다. 그리고 조금 더 보면 더 이상한 것이 보입니다. 이 마당은 평평하지도 않습니다.

남쪽이 1미터 낮다

근정전 앞 조정(朝庭)은 북고남저 구조입니다. 북쪽보다 남쪽이 약 1미터 낮습니다. 왕이 선 북쪽이 높고 신하들이 도열한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집니다.

이건 위계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물리적으로는 배수 설계입니다.

  • 물은 북에서 남으로 흘러 마당 양 끝의 수구로 빠집니다
  • 가운데 어도(御道)가 불룩하게 솟아 있어 물을 양옆으로 흘려보냅니다
  • 모인 물은 금천으로 나갑니다

기와지붕에서 쏟아지는 빗물과 마당에 떨어지는 비를 감당해야 하는 넓은 포장면입니다. 물이 고이면 얼고, 얼면 돌이 들뜹니다. 기울이는 것이 답입니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돌을 캔 방식에 있다

박석의 산지는 오랫동안 “강화도”라고만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학술적으로 좁혀진 것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최명주·이찬희·조영훈, 「경복궁 근정전 박석의 산지와 운송과정 해석」(『암석학회지』 24권 3호, 2015)이 근정전 박석과 강화 석모도 낙가산 일대의 화강암을 비교했습니다. 암상, 구성광물, 조직, 지구화학적 특징이 거의 동일했습니다. 국가유산청도 2025년 “근정전 박석 산지인 강화군 석모도”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참고로 옛 기록에 나오는 매음도(매도) 는 별개의 섬이 아닙니다. 숙종 때 간척으로 석모도에 합쳐졌습니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어떻게 캤는가 입니다.

화강암은 양파 껍질처럼 벗겨진다

논문은 채석과 운송의 부담을 줄이려고 화강암 박리돔(exfoliation dome)의 물리적 풍화 특성을 이용해 판상 석재를 떠냈다고 해석합니다.

화강암은 원래 땅속 깊은 곳에서 높은 압력을 받으며 굳은 암석입니다. 그 위를 덮고 있던 지층이 침식으로 벗겨지면 압력이 풀리고, 암석은 팽창하면서 표면과 나란한 방향으로 판상 균열이 생깁니다. 그 결과 바깥쪽부터 양파 껍질처럼 판째로 떨어져 나갑니다. 설악산 울산바위나 북한산의 둥근 바위 표면에서 볼 수 있는 그 구조입니다.

돌을 깨서 판을 만드는 대신, 이미 판으로 갈라지려 하는 성질을 그대로 쓴 것입니다. 깎는 노동과 깨질 위험이 함께 줄어듭니다. 캐낸 판석은 석포리 선착장에서 배에 실려 한강 조운로를 따라 한양으로 들어왔습니다.

다만 여기서 정확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논문 저자의 해석으로 표기된 내용입니다. “밝혀졌다”가 아니라 “그렇게 본다”가 맞습니다. 이 편에서 과학적으로 검증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암석 산지 동정까지입니다.

“눈부심을 막으려고 거칠게 다듬었다”는 이야기

박석을 소개하는 글에 거의 반드시 나오는 설명이 셋 있습니다.

  • 눈부심 방지 — 표면이 거칠어 빛이 난반사되므로 신하들이 눈부시지 않다
  • 미끄럼 방지 — 비 오는 날 미끄러지지 않는다
  • 배수 — 표면 요철이 물을 흘려보낸다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확인해 보면 상황이 다릅니다.

  • 그렇게 적어 둔 기록이 없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sillokwiki의 박석 항목에는 눈부심·미끄럼·배수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습니다.
  • 2015년 논문은 세 기능을 전제로 서술할 뿐입니다. 그 논문의 연구 대상은 산지이지 기능이 아닙니다.
  • 반사율이나 눈부심을 실측한 연구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셋 중 물리적 근거가 분명한 것은 배수뿐이고, 그것도 표면 요철이 아니라 마당 전체의 경사 입니다. 나머지 둘은 현대에 붙은 해석입니다. 그럴듯하다는 것과 근거가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그래서 이 편에서는 “이유를 적어 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로 끝냈습니다. 모른다고 말하는 쪽이 정확하고, 오히려 더 오래 남습니다. 나도는 다른 설들(보안, 주의 환기, 음향 효과)도 마찬가지로 근거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흔히 섞이는 오해들

  • 박석 매수와 조정 면적 — 공개된 공식 수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인터넷에 도는 “몇 천 장”은 출처가 불분명합니다.
  • “세종 때 깔았다” — 뒷받침 사료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현재의 근정전이 1867년(고종 4) 중건이라는 사실뿐입니다.
  • “정조가 근정전에 품계석을 세웠다” — 품계석은 창덕궁 인정전정조 1년(1777) 9월 처음 세워졌습니다. 그때 경복궁은 임진왜란 이후 180년 넘게 폐허였습니다. 근정전 품계석은 1867년 중건 이후의 것입니다. 90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다만 “중건 때 세워졌다”는 명시적 1차 사료도 확인되지 않아, 정황으로만 말할 수 있습니다.
  • “일제가 근정전 박석을 걷어냈다”창덕궁 인정전 사례와의 혼동으로 보입니다. 인정전에 지금 깔린 돌은 1970년대 복원 때 기계로 반듯하게 다듬어 깐 화강석입니다. 근정전에 같은 일이 있었다는 서술은 1차 자료로 교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사료에 남은 것 — 박문수의 보고

기록이 없다고 했지만, 박석 자체에 대한 기록은 있습니다. 『영조실록』 25년(1749) 6월 27일, 호조판서 박문수가 아룁니다.

전정에 옛날 깐 박석이 많이 없어졌으니 이제 수보해야 한다.

궁궐 공사용 박석은 주로 강화도에서 취용했다는 기록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이유는 안 적었지만 관리 이력은 적어 둔 셈입니다.

근정전 조정 —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마당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지금도 이어지는 문제 — 돌이 모자란다

2025년 7월, 궁능유적본부는 협생문 터에서 발굴된 박석 257매 중 상태가 양호한 약 30매를 근정전 앞 박석 보완에 쓰겠다고 보고했습니다. 새로 캐는 대신 옛 돌을 재활용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석모도 채석이 중단돼 보수용 석재 수급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 경복궁관리소의 설명입니다. 산지를 찾아냈지만 그곳에서 더 캘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덧붙이면, 2008년 발굴된 박석 230점 중 201점이 2016년 화장실 입구 공사에 쓰여 2024년 국정감사에서 문제가 된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 30매를 아껴 쓰는 상황과 겹쳐 놓고 보면 씁쓸한 대목입니다.

※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사진 중 박석만 담은 전용 컷은 없습니다. 근정전 전경 사진에서 마당 포장이 보이는 정도라, 표면 질감을 가까이 담은 사진은 싣지 못했습니다.

참고 자료

관련 영상

유튜브 채널 「옛것의 과학」에서 다른 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요

저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저평가된 대목이 눈부심 방지설의 근거 없음이라고 봅니다. 박석을 소개하는 글마다 빠지지 않는 설명인데 sillokwiki에도, 2015년 논문에도 그렇게 적은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그럴듯한 이야기를 검증 없이 물려받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진짜 감탄할 지점은 화강암이 양파 껍질처럼 벗겨지는 박리 성질을 그대로 살려 판석을 떠냈다는 해석 쪽인데, 이건 자연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고 이용한 기술이라 눈부심설보다 훨씬 실감 나는 조상들의 지혜입니다. 다만 석모도 채석이 중단돼 발굴 박석 30매를 아껴 쓰는 지금 상황을 보면, 산지를 밝혀내는 것과 그 유산을 이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근정전에 가시게 되면 바닥돌의 거친 표면보다 마당 전체가 남쪽으로 1미터 기울어 있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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