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2014년, 나주의 옛 무덤에서 금빛 신발 한 켤레가 나왔습니다. 좌우 한 쌍이 거의 훼손 없이 온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발굴팀을 놀라게 한 건 신발 자체가 아니라, 신발 안에 들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무덤 주인의 발뒤꿈치 뼛조각과 함께, 파리 번데기 껍질 열 몇 개체가 나온 겁니다.
신을 수 없는 신발
이 신발은 애초에 신으려고 만든 물건이 아닙니다. 두께가 1mm도 안 되는 얇은 금동판을 오려 붙여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이 체중을 싣고 걸으면 그대로 찌그러집니다. 게다가 바닥에는 스파이크처럼 징이 여러 개 박혀 있습니다. 걷기 위한 신발이라면 있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즉 이것은 장송의례용, 세상을 떠난 이에게 신겨 보내는 저승길의 신발입니다. 표면에는 육각형 거북등 문양을 촘촘히 새기고, 그 칸마다 용과 봉황, 사람 얼굴을 한 새(인면조) 같은 상서로운 존재들을 투조로 뚫어 넣었습니다. 죽은 이가 가는 길을 지켜 달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삼국시대를 통틀어 하나뿐인 용머리
정촌고분 금동신발이 특별한 이유는 발등에 있습니다. 이 신발에는 발등 위로 튀어나온 용머리 장식이 달려 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삼국시대 금동신발을 다 뒤져도 이런 장식이 붙은 것은 이 한 켤레뿐입니다.
백제 5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2021년에 고창 봉덕리 고분에서 나온 금동신발과 함께 보물로 지정됐습니다. 삼국시대 금동신발이 보물이 된 첫 사례입니다.
금동판 넉 장으로 만든 신발
복원 연구를 통해 이 신발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재료는 금동판 넉 장이 전부입니다. 바닥판 하나, 좌우 옆판 둘, 발목을 감싸는 깃판 하나. 이 넉 장이 만나는 자리마다 작은 은 못을 줄지어 박아 고정했습니다. 못 하나하나가 접합점이자 장식인 셈입니다.
몸판의 두께는 0.5mm 남짓한 구리판이고, 그 위에 순도 99%에 가까운 금을 5~10마이크로미터 두께로 입혔습니다. 머리카락 굵기가 보통 50~100마이크로미터쯤이니, 금층은 그 10분의 1 정도인 셈입니다. ‘금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금 덩어리가 아니라, 구리 위에 극도로 얇게 씌운 금입니다.
문양은 세 가지 기법을 함께 썼습니다.
- 투조(透彫) — 금속판을 아예 뚫어 내 무늬를 만드는 기법입니다. 신발 옆면이 그물처럼 비쳐 보이는 게 이것입니다
- 축조(蹴彫) — 끌로 쪼아 점을 찍고, 그 점을 이어 선을 만드는 기법입니다. 점 하나가 망치질 한 번이니, 이 작은 신발 하나에 수천 번의 망치질이 들어갔습니다
- 선각(線刻) — 가는 선을 직접 그어 새기는 기법입니다
두께 0.5mm짜리 판을 뚫고 쪼고 긋는 작업입니다. 조금만 힘을 잘못 줘도 판이 찢어집니다. 화려함 이전에, 손이 대단히 정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파리가 증언한 장례 절차
다시 파리 번데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금동신발 안에서 곤충 유체가 나온 것은 국내에서 처음이었고, 연구진은 여기에 법의곤충학을 적용했습니다.
파리는 시신에 알을 낳고, 그 알이 구더기를 거쳐 번데기가 되기까지 평균 6.5일이 걸립니다. 신발 안에 번데기 껍질이 남아 있다는 건, 시신이 최소한 그만큼의 시간 동안 땅에 묻히지 않고 어딘가에 놓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문헌에만 전하던 빈(殯)의 물증입니다. 빈은 사람이 죽은 뒤 바로 매장하지 않고 일정 기간 시신을 안치해 두는 장례 절차입니다. 기록으로는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절차가 있었다는 것을 유물로 입증한 사례는 드물었습니다. 1500년 전 장례식의 진행 시간표가 곤충의 생활사로 복원된 셈입니다.
이것이 문헌에만 전하던 빈(殯)의 물증입니다. 빈은 사람이 죽은 뒤 바로 매장하지 않고 일정 기간 시신을 안치해 두는 장례 절차입니다. 기록으로는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절차가 있었다는 것을 유물로 입증한 사례는 드물었습니다. 1500년 전 장례식의 진행 시간표가 곤충의 생활사로 복원된 셈입니다.
추론이 성립하려면 조건이 두 개 필요합니다. 첫째, 파리가 시신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돌로 막아 봉한 무덤 안으로는 파리가 들어가지 못하니, 알을 낳은 시점에 시신은 바깥 공기에 노출돼 있었어야 합니다. 둘째, 남은 것이 번데기 껍질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껍질만 남았다는 건 성충이 우화해 날아갔다는 뜻이고, 그러려면 알에서 번데기까지의 시간이 온전히 지나갔어야 합니다.
열 몇 개의 껍질이 모두 같은 종이었다는 점도 우연히 섞여 든 게 아니라는 근거가 됩니다. 연구소는 이 종을 검정뺨금파리(Chrysomya megacephala)로 추정했습니다.
덤으로 딸려 온 정보도 있습니다. 검정뺨금파리는 지금도 정촌고분 주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종이 살 수 있는 기후 조건이 1500년 동안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돌에 새긴 기록과 같은 답
곤충이 내놓은 결론은 문헌과도 맞물립니다.
공주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에는 무령왕이 523년에 세상을 떠나 27개월 뒤인 525년에 대묘에 안장됐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삼년상에 해당하는 기간을 돌에 못 박아 남긴 기록입니다. 시신을 모셔 두었던 빈전 터로 추정되는 유적도 공주 정지산에서 발굴됐습니다.
왕은 27개월, 영산강의 수장은 최소 엿새. 기간의 규모는 다르지만 ‘바로 묻지 않는다’는 원칙은 같습니다. 돌에 새긴 글과 신발 속 파리 껍질이 서로 다른 경로로 같은 답에 도착한 셈입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무덤의 주인은 누구였나
무덤 주인은 40대 여성이며 상당한 위세를 지닌 수장급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합니다.
정촌고분이 자리한 영산강 유역 세력의 성격은 학계에서 아직 논쟁 중이기 때문입니다. 백제의 지방 세력으로 보는 견해와, 백제와는 구별되는 마한계 독자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맞서 있습니다. 금동신발처럼 격이 높은 위세품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백제 중앙에서 내려준 하사품인지 이 지역이 자체적으로 만든 것인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유물 하나로 정치적 소속을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위세품이 오간 방식 자체는 당시의 외교를 보여줍니다. 백제 왕실이 바다 건너 왜의 왕에게는 칠지도를 보내고, 지방의 유력자들에게는 금동신발을 내렸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신을 수 없는 신발을 만들어 보내는 일이 곧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던 셈입니다. 어느 쪽 견해를 따르든, 이 땅의 세력이 백제와 깊이 얽혀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마치며 — 부장품이 남긴 시간표
금동신발은 화려한 껴묻거리입니다. 하지만 이 유물이 알려준 가장 흥미로운 정보는 금도 용머리도 아니라, 그 안에 우연히 남은 곤충 껍질이었습니다.
껴묻거리는 죽은 이를 위해 넣은 물건이지만, 그 안에는 장례를 치른 산 사람들의 시간도 함께 갇힙니다. 며칠간 시신을 모셔 두고, 신발을 신기고, 무덤을 닫기까지 — 기록에 남지 않은 그 과정을 파리 한 마리가 대신 증언했습니다.
참고 자료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보물 지정 정보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발굴조사 성과
- KCI,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의 제작기술과 복원」 — 판 구성·도금 두께·문양 기법의 근거
- 뉴시스, 「1500년전 파리 번데기 껍질, 무덤의 비밀 풀다」
- 아시아경제,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 주인은 40대 여성 수장」
- 경향신문, 「무령왕비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다」 — 무령왕릉 지석과 정지산 빈전 터
- 위키백과, 「나주 복암리 고분군」
관련 영상
본편 「닫힌 무덤 속 신발에서 파리가 나왔다」 바로 보기 — 8분 50초 심층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