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중순, 남부 지방의 오래된 절을 찾으면 숲 바닥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 잎도 없는 맨 꽃대 끝에, 가늘게 말린 꽃잎과 길게 뻗은 수술이 거미 다리처럼 펼쳐진 꽃. 꽃무릇입니다. 석산(石蒜)이라고도 부릅니다.
많은 분이 이 꽃을 상사화라고 부르지만, 사실 다른 꽃입니다. 그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사진: “高麗川でのヒガンバナ (Lycoris radiata)” by t-mizo is licensed under CC BY 2.0. To view a copy of this license, visit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
상사화가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상사화 축제”, “상사화 명소”로 소개되는 사진의 대부분이 실은 꽃무릇입니다. 둘 다 수선화과 상사화속이고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습성도 같아서 혼동이 잦지만, 나란히 놓고 보면 전혀 다르게 생겼습니다.
| 꽃무릇(석산) | 상사화 | |
|---|---|---|
| 꽃 색 | 진한 선홍색 | 연분홍·연보라 |
| 꽃 모양 | 가늘고 뒤로 말린 꽃잎, 거미 다리처럼 긴 수술 | 넓은 나팔 모양 |
| 개화 | 9~10월 (초가을) | 7~8월 (한여름) |
| 잎 나는 때 | 꽃이 진 뒤 늦가을 — 겨울을 나고 초여름에 시듦 | 봄에 나서 여름 전에 시듦 |
초가을에 새빨간 거미 모양이면 꽃무릇, 한여름에 연분홍 나팔이면 상사화입니다. 선운사·불갑사의 그 유명한 붉은 융단은 전부 꽃무릇입니다.
잎이 겨울을 나는 꽃
꽃무릇의 한살이는 거꾸로 흐릅니다. 가을에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진 뒤에야 잎이 돋습니다. 그 잎은 다른 풀이 다 말라 죽은 겨울 숲에서 푸르게 살아남아 볕을 독차지하고, 이듬해 초여름 숲이 우거지기 시작하면 시들어 사라집니다.
경쟁자가 없는 계절에만 잎을 내는 전략입니다. 잎과 꽃이 서로를 모르는 건 이 시간표의 결과일 뿐이지요. 상사화가 여름을 피해 잎을 내는 것과 정확히 반대 방향의 해법입니다.

사진: “Lycoris radiata (Matsudo, Chiba, Japan)” by t-mizo is licensed under CC BY 2.0. To view a copy of this license, visit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
절 마당에 이 꽃이 많은 이유
선운사, 불갑사, 용천사. 이름난 꽃무릇 군락지가 하나같이 절 주변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꽃무릇 알뿌리에는 리코린(lycorine)이라는 독성 알칼로이드가 들어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이 독을 역으로 이용했습니다. 알뿌리를 찧어 쑨 풀에 방부 효과가 있어서, 탱화를 배접하고 경전을 엮을 때 이 풀을 쓰면 좀이 슬지 않았습니다. 절마다 꽃무릇을 심은 건 관상용이 아니라 경전과 불화를 지키는 재료를 기른 것입니다.
지금 남은 대규모 군락은 그 쓰임의 흔적인 셈입니다.
심기 — 시기와 방법
심는 시기는 꽃이 진 직후부터 잎이 나기 전(10~11월), 또는 잎이 시든 초여름 휴면기입니다. 개화 직전인 8~9월만 피하면 됩니다.
- 자리: 반그늘이 좋습니다. 낙엽수 아래처럼 여름엔 그늘지고 겨울엔 볕이 드는 곳이 이상적입니다 — 겨울에 잎이 광합성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깊이: 알뿌리 높이의 2배 정도로 심고, 포기 사이는 한 뼘쯤 띄웁니다.
- 흙: 배수가 잘 되면서도 약간 촉촉함이 유지되는 곳. 물이 고이면 알뿌리가 썩습니다.
물주기와 관리
땅에 자리 잡으면 거의 방임해도 됩니다. 잎이 있는 늦가을~봄에는 흙이 마르면 주고, 잎이 시든 여름 휴면기에는 물을 줄입니다.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 겨울에 푸른 잎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죽은 게 아니라 이 꽃의 제철입니다. 잎을 밟거나 잘라내면 이듬해 꽃이 부실해집니다.
번식 — 씨앗이 없는 꽃
우리나라의 꽃무릇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번식은 오직 알뿌리 나누기입니다.
몇 해 지나면 어미 알뿌리 옆에 새끼가 붙어 저절로 포기가 늘어납니다. 3~4년에 한 번, 휴면기에 캐서 나눠 심으면 됩니다. 그 넓은 선운사 군락도 이렇게 알뿌리가 불어나 만들어진 것입니다.
독성 주의
리코린은 사람과 동물 모두에게 독입니다. 먹으면 구토·신경 마비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 알뿌리가 양파나 수선화 구근과 비슷하게 생겨 오인 사고가 있습니다. 식용 작물과 섞어 보관하지 마세요.
- 심고 만진 뒤에는 손을 씻고, 반려동물·아이가 있는 집은 심는 위치를 고려하세요.
- 다만 만지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없으니 지나치게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군락지 — 9월의 붉은 융단
- 고창 선운사 — 도솔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가장 유명한 군락
- 영광 불갑사 — 상사화 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리지만 주인공은 꽃무릇
- 함평 용천사 — 한적하게 즐기기 좋은 군락
세 곳 모두 절정은 9월 중순~말입니다. 꽃은 일주일 남짓이면 절정을 지나니, 개화 소식을 확인하고 움직이는 게 좋습니다.
마무리
꽃무릇은 심어두면 해마다 초가을, 잎도 없이 불쑥 붉은 꽃대를 올립니다. 겨울엔 푸른 잎으로 빈 뜰을 채우고요. 남들과 반대로 사는 시간표 하나로 천 년 넘게 절 마당을 지켜온 꽃입니다.
올 9월, 붉은 융단을 보러 가시거든 발밑의 꽃이 상사화가 아니라 꽃무릇이라는 것도 함께 기억해 주세요.
저는 이 꽃에서 사람들이 가장 놓치기 쉬운 대목이 9월의 붉은 융단이 아니라 겨울의 푸른 잎이라고 봅니다. 다들 선운사 개화 시기만 검색하지만, 정작 이 꽃의 승부처는 다른 풀이 다 죽은 겨울 숲에서 홀로 볕을 독차지하는 그 시간표라고 생각합니다. 절마다 꽃무릇을 심은 이유도 감상이 아니라 리코린의 방부 효과로 경전과 탱화를 지키려던 실용이었다는 점에서, 이 꽃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 좋으라고 존재한 적이 없는 셈입니다. 그래서 집에 심으실 분들께는 꽃보다 잎을 기준으로 판단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 겨울에 볕이 드는 자리를 내줄 수 없다면, 씨앗도 맺지 못하고 오직 알뿌리로만 버티는 이 꽃에게는 좋은 집이 아닐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