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경주 불국사에 가면 축대의 돌들이 제각각인 것을 보게 됩니다. 반듯하게 자른 돌이 아니라 생긴 대로의 바위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목조 건물의 주춧돌도 마찬가지입니다. 울퉁불퉁한 자연석 위에 기둥이 그냥 서 있습니다.
이걸 두고 “기술이 부족해서 대충 쌓았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돌을 다듬지 않기로 하고, 대신 나무를 돌에 맞춰 깎았습니다. 이 기법을 그렝이 공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렝이칼로 굴곡을 옮겨 적는다
작업 순서는 이렇습니다.
- 자연석 초석 위에 기둥을 세워 대략 자리를 잡습니다.
- 그렝이칼(그레자)이라는 두 갈래 도구를 씁니다. 한쪽 다리는 돌 표면을 따라 훑고, 다른 쪽 다리는 그 높낮이를 그대로 기둥 옆면에 선으로 그립니다. 컴퍼스로 본을 뜨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 기둥을 눕혀 그 선까지 밑동을 파냅니다.
- 다시 세우면 나무 밑면이 돌의 요철과 틈 없이 맞물립니다.
돌 하나하나가 다르니 기둥도 하나하나 다르게 깎입니다. 규격화된 부재를 찍어내는 방식과 반대편에 있는 접근입니다.
왜 고정하지 않는 쪽이 더 버티는가
서양 석조 건축에서는 초석에 홈을 파고 기둥을 끼워 고정하는 방식이 흔합니다. 직관적으로는 이쪽이 튼튼해 보입니다. 그런데 지진처럼 수평으로 흔드는 힘이 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 홈에 박은 기둥: 흔들림이 접합부 한 점에 집중됩니다. 버티다가 한계를 넘으면 부러지거나 홈이 깨집니다.
- 그렝이로 맞물린 기둥: 돌의 거친 표면 전체가 나무 밑면과 맞물려 있습니다. 옆으로 밀려도 요철에 걸리고, 접촉 면적이 넓어 힘이 한 점에 몰리지 않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매끈하게 다듬은 평평한 돌 위였다면 오히려 미끄러졌을 것입니다. 거칠기가 마찰이 되고, 굴곡이 걸림턱이 됩니다.
실험적 비교도 보고된 바 있습니다. 돌에 홈을 내고 기둥을 박은 구조는 지진 상황에서 내려앉거나 반파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반면, 그렝이로 맞물린 구조는 견디는 쪽으로 나타났습니다.
불국사 석축 — 500년, 22회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경주 인근에서는 지난 500여 년 동안 22회의 지진이 기록됐습니다. 2016년 경주 지진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동안 불국사의 석축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다만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신라인이 내진을 의도하고 설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기록이 없습니다. 자연석을 그대로 쓰면서 기둥을 수평으로 세우려면 이 방법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목재와 인력을 아끼는 실용적 판단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진에 강했다는 것과, 그것을 노리고 만들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건물 전체의 내진 성능을 그렝이 하나로 돌리는 것도 과장입니다. 한국 목조 건축의 내진성은 못을 쓰지 않는 결구, 지붕 하중을 분산하는 공포, 무거운 지붕이 만드는 안정성 등이 함께 만들어 냅니다. 그렝이는 그중 기초 접합부가 맡은 몫입니다.
덤벙주초라는 이름
자연석을 그대로 쓴 초석을 덤벙주초라고 부릅니다. “덤벙덤벙 놓았다”는 어감이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수고가 들어갑니다. 돌을 다듬는 품을 아낀 대신 기둥마다 본을 떠서 깎는 품이 들어갑니다.
돌을 반듯하게 가공하려면 채석과 석공 작업이 크게 늘어납니다. 화강암이 많은 우리 땅에서 그 비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재료를 사람에게 맞추는 대신, 사람이 재료에 맞추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표기는 “그렝이”와 “그랭이”가 함께 쓰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렝이로 통일했습니다.
다른 편과 이어지는 지점
이 채널에서 다룬 [첨성대]와 [석굴암]도 접착제 없이 돌을 맞물려 세운 구조입니다. 우리 옛 건축이 반복해서 택한 방식이 하나 있다면 부재를 고정하지 않고 맞물리게 하는 것입니다. 고정은 힘을 한 점에 모으고, 맞물림은 힘을 나눕니다.
마치며
그렝이 공법은 돌을 이기려 하지 않은 기술입니다. 자연석의 생김새를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사람이 다룰 수 있는 나무 쪽을 바꿨습니다. 그 선택이 500년의 지진을 건너온 이유가 됐습니다.
참고 자료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관련 영상
쇼츠 「돌을 안 다듬고 기둥을 깎아서 지진을 견딘 건물」 — 영상 업로드 후 링크 연결 예정
유튜브 채널 「옛것의 과학」에서 다른 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요
저는 이 글에서 가장 눈여겨볼 대목이 화려한 결과보다 “신라인이 내진을 의도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선을 그은 부분이라고 봅니다. 500년 동안 22회의 지진을 견뎠다는 결과만 놓고 조상의 신비한 예지처럼 포장하는 순간, 그렝이 공법의 진짜 교훈인 실용적 판단의 힘이 오히려 가려진다고 생각합니다. 돌을 다듬는 품을 아끼려고 그렝이칼로 굴곡을 본떠 나무를 깎았을 뿐인데, 그 게으름 아닌 게으름이 홈에 박아 고정하는 방식보다 오래 버티는 구조를 만들어 냈다는 게 이 이야기의 핵심 아닐까요. 덤벙주초라는 이름처럼 대충 놓은 듯 보이는 것에 기둥마다 본을 뜨는 수고가 숨어 있다는 사실도, 겉만 보고 기술 수준을 판단하는 습관을 한 번 돌아보게 합니다. 저는 재료를 사람에게 맞추기보다 사람이 재료에 맞춘다는 태도가, 규격화에 익숙한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