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검은 옻칠 위에 청록빛과 분홍빛이 어른거립니다. 각도를 바꾸면 색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물감은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자개, 즉 조개껍데기 조각을 오려 붙였을 뿐입니다.
색소색과 구조색
색이 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색소색은 물질이 특정 파장의 빛을 흡수해서 생깁니다. 빨간 물감은 빨강 이외의 빛을 흡수합니다. 이 방식의 약점은 흡수하는 분자 자체가 빛과 산소에 의해 부서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감과 염료는 시간이 지나면 바랩니다.
구조색은 다릅니다. 물질이 빛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구조가 빛을 갈라 내면서 색이 생깁니다. 흡수하는 분자가 없으니 부서질 것도 없습니다. 구조가 무너지지 않는 한 색도 그대로입니다.
비눗방울 표면의 무지개, 나비 날개의 파랑, CD 뒷면의 색이 모두 구조색입니다. 자개도 여기에 속합니다.
진주층은 어떻게 생겼나
조개껍데기 안쪽의 반짝이는 층을 진주층(nacre) 이라고 합니다. 진주를 만드는 그 물질과 같습니다.
이 층은 균질한 덩어리가 아닙니다.
- 아라고나이트(탄산칼슘의 한 결정형) 판이 아주 얇게 깔립니다
- 그 위에 단백질 막이 얇게 덮입니다
- 다시 아라고나이트 판, 다시 단백질 — 이것이 수백 겹 반복됩니다
벽돌과 모르타르를 번갈아 쌓은 구조라고 흔히 비유합니다.
빛이 이 층에 들어오면 각 경계면에서 일부는 반사되고 일부는 통과합니다. 여러 층에서 반사된 빛들이 서로 겹치면서 어떤 파장은 강해지고 어떤 파장은 상쇄됩니다. 강해진 파장이 우리 눈에 보이는 색입니다. 보는 각도가 바뀌면 빛이 지나는 경로 길이가 달라지므로 강해지는 파장도 달라집니다 — 그래서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합니다.
이 구조는 색을 내려고 생긴 것이 아닙니다. 조개가 껍데기를 단단하고 깨지지 않게 만든 결과이고, 색은 그 부산물입니다.
초기에는 흰 조개, 나중에는 전복
나전에 쓰는 조개는 시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 초기에는 흰빛이 도는 야광패를 주로 썼습니다
- 후대 한국에서는 청록빛이 강한 전복껍데기를 주로 썼습니다
전복 자개의 그 짙은 청록은 한국 나전의 인상을 결정하는 요소입니다. 같은 기법이라도 어느 조개를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줄음질과 끊음질
자개를 붙이는 방법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줄음질은 자개를 무늬 모양대로 오려 내는 기법입니다. 실톱과 줄로 꽃잎, 잎사귀, 산과 나무의 윤곽을 따냅니다. 곡선이 살아 있는 유기적 형태에 적합합니다. 고려 나전의 정교한 국화·넝쿨무늬가 이 방식입니다.
끊음질은 자개를 실처럼 가늘게 썰어 놓고, 그것을 짧게 끊어 가며 붙이는 기법입니다. 이때 쓰는 도구가 상사기입니다. 가늘게 켠 자개 실을 상사(실오라기)라고 부르는 데서 온 이름입니다.
끊음질의 장점은 두 가지입니다.
- 자개를 아낍니다. 오려 내면 버리는 부분이 많은데, 실로 썰면 손실이 적습니다
- 기하 무늬에 강합니다. 짧은 직선을 이어 붙이는 방식이라 격자·번개무늬·긴 곡선을 균일하게 채웁니다
작업의 성격도 다릅니다. 줄음질은 오리는 일이고, 끊음질은 놓는 일입니다.
옻은 마르지 않고 굳습니다
자개는 옻칠한 바탕 위에 놓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옻을 올려 갈아 냅니다. 자개가 옻층 안에 잠기는 구조입니다.
옻칠은 흔히 “마른다”고 하지만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화학 반응으로 굳습니다.
- 옻의 주성분은 우루시올입니다
- 옻 속의 효소(락카아제)가 산소를 끌어들여 우루시올 분자를 서로 잇습니다
- 이 반응을 산화중합이라고 합니다. 작은 분자들이 그물처럼 얽혀 하나의 거대한 고분자가 됩니다
그래서 옻칠은 건조한 곳이 아니라 적당히 습하고 따뜻한 곳에서 더 잘 굳습니다. 반응에 물과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굳은 옻막은 물과 산·알칼리에 강하고, 자외선을 상당 부분 막아 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색은 구조가 만들어 바래지 않고, 그 구조를 옻이 감싸 지킵니다. 천년을 버티는 조합입니다.
고려 나전의 위상
고려 나전칠기는 당대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중국 문헌에도 고려의 나전이 정교하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문제는 남아 있는 유물이 매우 적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확인된 고려 나전은 수십 점 수준이고, 그 상당수가 해외에 있습니다. 일본·미국·유럽의 박물관과 사찰에 소장된 것이 많고, 국내에 있는 것은 손에 꼽습니다.
칠기는 유기물이라 보존이 어렵습니다. 습기와 불에 약하고, 옻막이 상하면 자개가 떨어져 나갑니다. 도자기나 금속기보다 살아남기 힘든 재질입니다.
통영, 그리고 지금
조선 후기 나전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통영이었습니다. 통제영에 소속된 공방(십이공방)에서 나전 제작이 이뤄졌고, 그 맥이 근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경상남도립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가 세워져 기술자를 길러 냈습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전통 공예가 급격히 위축되는 가운데 이런 교육기관이 맥을 잇는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나전장은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줄음질과 끊음질의 기능을 잇는 보유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서 보나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에 조선 나전 유물이 있습니다. 고려 나전은 국내 전시품이 드물어, 특별전이 열릴 때 해외 소장품이 함께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확인해 둘 것
- 자개의 색은 염료가 아닙니다. 진주층의 층상 구조가 만드는 구조색입니다
- “옻칠이 마른다”는 부정확합니다. 산소를 써서 굳는 화학 반응입니다
- 나전의 기원 시기는 학설이 갈립니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 “천년”은 고려 나전 유물을 기준으로 한 대략의 시간입니다
참고 자료
관련 영상
쇼츠 「물감을 한 방울도 안 썼는데 천년째 색이 그대로입니다」 — 영상 업로드 후 링크 연결 예정
유튜브 채널 「옛것의 과학」에서 다른 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요
저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대목이 끊음질이라고 봅니다. 자개를 실처럼 썰어 짧게 끊어 붙이는 방식이 재료 손실을 줄이려는 궁리에서 나왔다는 점은, 나전을 화려함의 공예가 아니라 아껴 쓰는 기술의 역사로 다시 보게 만듭니다. 옻이 마르는 게 아니라 습하고 따뜻한 곳에서 산소를 끌어들여 굳는다는 사실도, 막연히 “잘 말려야 한다”고 생각해 온 쪽에는 꽤 뒤집히는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 세계에 수십 점뿐인 고려 나전의 상당수가 해외에 있다는 대목은, 천년을 버티는 재료의 힘과 그것을 지키지 못한 시간의 무게를 같이 보여 주는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합니다. 특별전에서 해외 소장품이 들어오는 기회가 있다면, 사진이 아니라 각도 따라 색이 바뀌는 실물로 꼭 한번 확인해 볼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