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수표 — 앞면에는 눈금, 뒷면에는 구멍을 판 세종의 수위계

서울 청계천 수표

사진: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제1유형

돌기둥 하나가 개천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앞면에는 눈금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수표(水標)입니다. 물의 높이를 재는 기둥입니다.

측우기와 같은 해에 세웠습니다

수표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41년(세종 23) 입니다. 측우기와 같은 해입니다.

두 기구가 같은 해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비의 양과 물의 높이는 서로 다른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 측우기는 그 자리에 내린 비의 양을 잽니다. 지점의 강수량입니다
  • 수표는 하천에 실제로 모인 물의 높이를 잽니다. 유역 전체에서 모여든 결과입니다

상류에 비가 많이 왔는데 한양에는 안 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한양에 소나기가 쏟아져도 하천이 넘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의 양만 알면 홍수를 예측할 수 없고, 물의 높이만 알면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둘을 함께 봐야 대응이 됩니다.

농업 국가에서 가뭄과 홍수는 국가 재정과 직결되는 문제였고, 세종 대의 이 두 기구는 그 판단을 감(感)이 아니라 수치로 옮기려 한 시도입니다.

처음에는 나무, 나중에 돌

처음 세운 것은 나무 기둥이었습니다. 청계천 마전교 서쪽과 한강 두 곳에 설치했습니다.

나무는 물에 잠긴 채로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썩고, 벌레가 먹고, 물살에 흔들립니다. 수위를 재는 기준이 되려면 기준 자체가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데 나무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종 대에 돌기둥으로 교체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이 계열입니다.

3척 갈수 · 6척 평수 · 9척 대수

기둥에는 1척부터 10척까지 눈금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세 지점에 이름이 붙었습니다.

수위 이름 뜻
3척 갈수(渴水) 물이 마른 상태
6척 평수(平水) 보통 수위
9척 대수(大水) 위험 수위 — 범람 우려

물이 9척에 닿으면 개천이 넘친다는 뜻이었습니다. 눈금을 읽어 숫자를 아는 것과, 그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세 개의 이름이 그 해석을 담고 있었습니다.

현대의 하천 수위표도 같은 구조입니다. 관심·주의·경계·심각 같은 단계를 정해 두고 수위가 그 선을 넘으면 대응이 발동합니다. 눈금 위에 임계값을 얹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뒷면의 구멍은 무엇인가

수표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뒷면에 3척마다 뚫어 놓은 작은 구멍입니다. 갈수·평수·대수의 세 자리에 해당합니다.

용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돕니다.

  • 촉지설 — 어두운 밤이나 흐린 물속에서 손으로 만져 수위를 알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비는 밤에도 오고, 급할 때는 등불을 들 여유가 없습니다
  • 시인성설 — 멀리서도 세 개의 기준선을 빠르게 알아보게 한 표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료가 말하는 것과 추정을 구분해야 합니다. 기록이 전하는 것은 3척마다 구멍을 파서 갈수·평수·대수를 표시했다는 사실까지입니다. 그 구멍을 손으로 만져 읽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럴듯한 설명이 사료보다 앞서 나가는 일은 흔합니다. 이 채널에서도 근정전 박석을 다루며 근거 없는 원리를 붙였다가 되짚은 적이 있습니다. 구멍의 존재는 사실, 용도는 추정 — 이 선을 그어 두는 편이 낫습니다.

수표단자 — 읽은 값이 임금에게 갔습니다

기둥이 서 있다고 정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읽고, 적고, 전달되어야 합니다.

운용은 이렇게 이뤄졌습니다.

  1. 비가 오면 예조가 수위를 확인합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입니다
  2. 읽은 수심을 종이에 적습니다
  3. 이 문서를 임금에게 올립니다 — 이것을 수표단자(水標單子) 라고 합니다

돌기둥 하나가 국가의 보고 체계에 물려 있었던 것입니다. 측정 기구를 만드는 일과, 그 값이 최고 결정권자에게 정기적으로 도달하는 절차를 만드는 일은 별개인데, 조선은 둘 다 갖춰 놓았습니다.

현존하는 수표는 세종 대의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흔히 혼동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서울 청계천 수표」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든 그 수표가 아닙니다. 성종 대 이후의 것으로 보며, 세종 대 원형과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눈금의 세밀함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 대의 수표에는 척 아래로 촌(寸)과 푼(分) 단위까지 새겼다고 전하는데, 현존 보물 수표에는 척 단위만 새겨져 있습니다.

두 시기를 섞어서 “세종이 만든 수표가 지금 남아 있다”고 쓰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1척은 몇 센티미터인가

수치를 환산하고 싶어지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조선의 자는 용도에 따라 종류가 달랐습니다. 주척(周尺), 영조척(營造尺), 포백척(布帛尺) 등이 있었고 각각 길이가 다릅니다. 시기에 따라서도 변동이 있었습니다.

수표의 척이 어느 자를 기준으로 한 것인지는 자료마다 견해가 갈립니다. 그래서 “9척 = 몇 미터”라고 단정하는 환산은 하지 않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 수치가 아니라 갈수-평수-대수라는 상대적 기준 체계입니다.

지금 어디 있나

원래 자리는 청계천 수표교 옆이었습니다. 청계천 복개 공사로 수표교와 수표가 옮겨졌고, 수표는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습니다. 수표교는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습니다.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원래 자리 부근에 표지가 세워졌지만, 실물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다리와 기둥이 서로 다른 곳에 흩어져 있는 셈입니다.

확인해 둘 것

  • 뒷면 구멍이 촉지용이라는 것은 추정입니다. 사료는 3척마다 구멍을 파 표시했다는 데까지입니다
  • 현존 보물 수표는 세종 대의 것이 아닙니다. 성종 대 이후의 것으로 봅니다
  • 1척의 길이를 단정하지 않습니다. 주척·영조척 논의가 갈립니다

참고 자료

관련 영상

쇼츠 「앞면에는 눈금, 뒷면에는 구멍을 팠습니다」 — 영상 업로드 후 링크 연결 예정

유튜브 채널 「옛것의 과학」에서 다른 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요

저는 청계천수표에서 가장 저평가된 대목이 수표단자라고 봅니다. 눈금 새긴 돌기둥 자체보다, 비가 올 때마다 예조가 수위를 읽어 종이에 적고 임금에게까지 올리는 절차를 갖춘 쪽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측정 기구는 한 번 만들면 끝이지만 보고 체계는 사람이 수백 년을 반복해야 유지되는 것이니까요. 뒷면 구멍을 밤에 손으로 더듬어 읽었다는 이야기가 더 극적이어서 자주 회자되지만, 정작 사료가 확인해 주는 것은 3척마다 구멍을 파 갈수·평수·대수를 표시했다는 데까지라는 점도 이 글을 읽고 따로 새겨둘 만한 부분입니다. 1척이 몇 센티미터냐를 따지는 것보다, 9척이면 넘친다는 기준선을 정해 두고 그 선에 대응을 물려 놓은 발상 자체를 봐야 한다는 데에 저도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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