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저녁, 초가지붕이나 담장 위에서 하얀 꽃이 하나둘 켜지듯 피어나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낮에는 아무 일 없던 덩굴이 해가 지면 비로소 꽃을 여는, 박꽃입니다.

이미지: AI로 생성한 개화 타임랩스 프레임 (잊혀진 정원)
시계 대신 박꽃을 보았다는 이야기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박꽃이 피면 저녁밥을 지을 시간이었다고 전합니다. 해가 기울고 사방이 어둑해질 무렵 어김없이 꽃이 열리니, 부엌에 불을 넣을 때를 알려 주는 셈이었습니다.
흥부전에서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도 이 식물입니다. 흥부가 켠 박은 박꽃이 진 자리에 열린 열매입니다.
왜 하필 저녁에 필까
이유가 있습니다. 박꽃의 꽃가루를 옮기는 것은 벌이 아니라 초저녁에 활동하는 박각시나방입니다. 나방이 날아다니는 시간에 맞춰 꽃을 여는 것이고, 꽃이 흰색인 것도 같은 까닭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색보다 밝기가 눈에 띄기 때문에, 흰 꽃이 나방에게 가장 잘 보입니다.
그래서 박꽃은 저녁에 수평으로 활짝 퍼졌다가 이튿날 아침이면 시듭니다. 한 송이의 수명이 하룻밤인 셈입니다.
박은 어떤 식물인가
박과의 덩굴성 한해살이풀입니다. 원산지는 아프리카 또는 열대아시아로 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가 부근에서 길러 왔습니다.
| 항목 | 내용 |
|---|---|
| 학명 | Lagenaria siceraria |
| 생활형 | 덩굴성 한해살이풀 |
| 개화 | 7~9월, 저녁에 피어 아침에 시듦 |
| 꽃 | 흰색, 지름 5~10cm, 꽃부리가 5갈래 |
| 잎 | 심장형~콩팥 모양, 부드러운 털 |
| 줄기 | 덩굴손으로 감으며 뻗음 |
| 열매 | 지름 30cm 이상의 편평한 구형 |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핍니다. 수꽃은 꽃자루가 길고, 암꽃은 꽃자루가 짧으며 꽃 밑에 작은 박 모양 씨방이 달려 있어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AI로 생성한 개화 타임랩스 프레임 (잊혀진 정원) — 3단계

사진: “Lagenaria siceraria Clavata Group2SHSU” by Shu Suehiro is licensed under CC BY 3.0. To view a copy of this license, visit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3.0/.
심기 — 볕과 올라갈 자리
- 볕 — 양지가 원칙입니다. 그늘에서는 덩굴만 길고 꽃과 열매가 적습니다.
- 물 — 겉흙이 마르면 흠뻑 줍니다. 잎이 넓어 여름 한낮에는 물이 금방 마릅니다.
- 자리 — 덩굴이 몇 미터씩 뻗으므로 타고 오를 담장이나 지지대가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초가지붕에 올린 것도 그 때문입니다.
씨뿌리기
- 봄, 서리가 끝난 뒤 씨를 뿌립니다. 추위에 약해 너무 이르면 싹이 상합니다.
- 씨껍질이 두꺼우므로 하룻밤 물에 불렸다가 뿌리면 싹이 고르게 틉니다.
- 싹이 트고 떡잎 뒤로 본잎이 나오면 덩굴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때 지지대를 대 줍니다.
박을 바가지로 만드는 법
박은 꽃보다 열매로 더 오래 쓰였습니다. 표피가 딱딱하게 굳은 박을 반으로 갈라 삶은 뒤 말리면 바가지가 됩니다. 속살은 흰색인데, 어린 박은 나물로도 먹었습니다.
이럴 땐 이렇게
꽃은 피는데 박이 안 열립니다 — 수꽃만 피고 있거나, 나방이 드나들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암꽃이 피면 수꽃의 꽃가루를 붓으로 옮겨 주는 방법도 있습니다.
잎만 무성합니다 — 질소 거름이 많거나 볕이 부족한 경우입니다.
낮에 가 보면 꽃이 없습니다 — 정상입니다. 박꽃은 저녁에 가서 보셔야 합니다.
꽃말
박꽃의 꽃말은 기다림입니다. 하루 종일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피는 꽃에 어울리는 말입니다.
마무리
박꽃은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꽃입니다. 한낮에 들여다보면 봉오리만 있고, 해가 져서 일을 마친 뒤에야 모습을 드러냅니다.
여름밤 담장 아래를 지나실 일이 있다면 한번 올려다보세요. 하루의 끝에 켜지는 흰 꽃이 거기 있을지도 모릅니다.
쇼츠 「모두 잠들 무렵 피고 해 뜨면 지는 꽃」 바로 보기 이 글의 이미지 중 일부는 실제 사진이 아니라 국립수목원 도감의 형태 기술을 바탕으로 생성한 것입니다. 종의 특징이 어긋나지 않도록 개화기·꽃 색·잎 모양을 도감과 대조해 만들었습니다.
참고 자료
- 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 식물도감 박(도감번호 31490)
제 생각은요
저는 이 글에서 가장 눈여겨볼 대목이 꽃말 이야기가 아니라 박각시나방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녁에 피는 것도, 흰색인 것도 결국 나방 눈에 띄기 위한 선택이라는 설명을 읽고 나면, 하룻밤 만에 시드는 짧은 수명이 아쉬움이 아니라 계산된 결과로 보입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건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는 사실인데, 꽃은 잘 피는데 박이 안 열린다며 애태우는 경우 대부분이 여기서 갈린다고 봅니다. 그래서 마당에 박을 올려 보실 분이라면 붓으로 꽃가루를 옮겨 주는 수고까지 감안하고 시작하시는 편이 낫고, 그게 번거롭다면 열매 욕심 없이 저녁 꽃 구경만 하는 쪽도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