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식물에서 잎과 꽃이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봄에 잎이 무성하게 올라왔다가 여름이 오기 전에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잎 하나 없는 맨 꽃대가 솟아 꽃을 피웁니다.
상사화입니다. 서로 그리워한다는 뜻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사진: “Lycoris squamigera 8/2021 Magic Lily-” by F. D. Richards is licensed under CC BY-SA 2.0. To view a copy of this license, visit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2.0/.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이유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생존 전략입니다.
상사화는 알뿌리(비늘줄기) 식물입니다. 봄에 잎을 내어 부지런히 광합성을 하고, 그렇게 만든 양분을 땅속 알뿌리에 저장합니다. 여름이 오면 잎은 제 할 일을 마치고 시들어버립니다. 그리고 한여름에서 늦여름, 저장해 둔 양분만으로 꽃대를 밀어 올려 꽃을 피웁니다.
잎이 광합성하는 시기와 꽃이 피는 시기를 아예 분리한 것입니다. 더위가 한창일 때 잎을 유지하는 비용을 치르지 않으면서도 꽃은 피우는 방식이지요.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만나지 않도록 시간을 나눈 것입니다.
상사화와 꽃무릇은 다른 꽃입니다
인터넷에서 “상사화”로 올라오는 사진의 상당수가 실은 꽃무릇(석산)입니다. 둘 다 수선화과 상사화속이고 잎과 꽃이 따로 나오는 습성도 같아서 혼동이 잦습니다.
| 상사화 | 꽃무릇(석산) | |
|---|---|---|
| 학명 | Lycoris squamigera | Lycoris radiata |
| 꽃 색 | 연분홍·연보라 | 진한 선홍색 |
| 꽃 모양 | 나팔 모양, 꽃잎이 넓다 | 가늘고 길게 뒤로 말리며 수술이 길게 뻗어 거미 같다 |
| 개화 | 7~8월 (한여름) | 9~10월 (초가을) |
| 잎 나는 때 | 봄에 나서 여름 전 시듦 | 꽃이 진 뒤 늦가을에 나서 겨울을 남 |
| 흔한 곳 | 정원·화단 | 남부 사찰 주변 군락 |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색과 시기입니다. 한여름에 연분홍이면 상사화, 초가을에 새빨간 거미 모양이면 꽃무릇입니다. 선운사·불갑사의 그 유명한 붉은 군락은 전부 꽃무릇입니다.

사진: “Lycoris squamigera 8/2021 Magic Lily-” by F. D. Richards is licensed under CC BY-SA 2.0. To view a copy of this license, visit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2.0/.
심기 — 시기와 깊이
심는 시기는 꽃이 진 뒤인 가을(9~10월)입니다. 이때 심으면 겨울 동안 뿌리를 내리고 이듬해 봄에 잎을 냅니다.
깊이는 알뿌리 높이의 2~3배가 기준입니다. 알뿌리 끝이 땅 위로 살짝 보일 정도로 얕게 심는 방식도 쓰이지만, 우리나라 중부 이북에서는 겨울 추위를 생각해 완전히 덮어주는 편이 안전합니다.
자리는 반그늘에서 양지 사이면 됩니다. 한여름 뙤약볕이 온종일 내리쬐는 곳보다, 오전 볕이 들고 오후에 그늘이 지는 자리가 꽃 색이 곱게 나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배수입니다. 알뿌리 식물이라 물이 고이면 썩습니다. 흙에 굵은 모래나 마사토를 섞어주면 좋습니다.
물주기와 관리
물은 흙이 마르면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특히 잎이 시든 뒤 꽃대가 올라오기 전까지의 휴면기에는 물을 줄여야 합니다. 이 시기에 습하게 두면 알뿌리가 상합니다.
거름은 잎이 있는 봄철에 줍니다. 잎이 양분을 만들어 알뿌리에 저장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꽃이 필 때 주는 거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잎이 노랗게 시들어도 자르지 마세요. 저절로 마를 때까지 두어야 알뿌리에 양분이 다 들어갑니다. 보기 싫다고 잘라내면 이듬해 꽃이 부실해집니다. 초보자가 가장 많이 하는 실수입니다.
번식 — 분구가 가장 쉽습니다
상사화는 씨앗이 잘 맺히지 않습니다. 알뿌리를 나누는 분구가 현실적인 번식법입니다.
한 자리에서 몇 해 지나면 어미 알뿌리 옆에 새끼 알뿌리가 붙어 늘어납니다. 3~4년에 한 번씩 캐내어 나누어 심으면 포기도 늘고 꽃도 잘 답니다. 너무 빽빽해지면 오히려 꽃이 줄어드니 이때가 나눌 때입니다.
캐는 시기는 잎이 완전히 시든 뒤부터 꽃대가 올라오기 전 사이, 또는 꽃이 진 가을입니다.
이럴 땐 이렇게
심었는데 꽃이 안 핍니다 — 알뿌리가 어리면 몇 해 키워야 꽃이 답니다. 심은 첫해에 안 피는 건 흔한 일입니다. 또는 지난봄에 잎을 일찍 잘라냈을 수 있습니다.
잎만 나고 끝납니다 — 정상입니다. 상사화는 봄에 잎, 여름에 꽃입니다. 잎이 시든 뒤 꽃대를 기다리세요.
알뿌리가 물러졌습니다 — 과습입니다. 배수가 안 되는 자리이거나 휴면기에 물을 준 경우입니다. 무른 부분을 도려내고 마른 흙에 다시 심어보되, 심하면 살리기 어렵습니다.
꽃말과 이야기
상사화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스님을 사모하다 세상을 떠난 처녀의 무덤에서 피어났다는 이야기, 반대로 여인을 마음에 둔 스님의 이야기 등 전해지는 형태가 여럿입니다. 공통점은 닿을 수 없는 두 사람이라는 구도입니다. 잎과 꽃이 같은 뿌리에서 나면서도 서로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 정서와 맞아떨어져 붙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절 주변에 상사화와 꽃무릇이 많이 심긴 데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알뿌리의 독성분이 방부 효과를 내서 탱화나 단청, 경전을 좀먹는 벌레를 막는 데 쓰였습니다. 이야기와 쓰임이 함께 남은 셈입니다.
마무리
상사화는 손이 많이 가지 않습니다. 배수 좋은 자리에 가을에 알뿌리를 묻어두고, 봄에 난 잎을 끝까지 두는 것. 이 둘만 지키면 해마다 한여름에 맨 꽃대를 올려 꽃을 보여줍니다.
잎이 시든 자리를 보며 끝났다고 생각할 때쯤 꽃대가 올라옵니다. 그 시차가 이 꽃의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