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서원이나 고택 마당에서 자주 만나는 나무가 있습니다. 매끄럽고 얼룩덜룩한 줄기 위로 주름진 종이꽃 같은 진분홍 꽃송이가 몇 달째 피어 있는 나무. 배롱나무입니다.
이 나무의 정체성은 사실 줄기에 있습니다.

사진: “starr-090623-1680-Lagerstroemia_indica-pink_flowers_and_leaves-Hana-Maui” by Starr Environmental is licensed under CC BY 2.0. To view a copy of this license, visit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
백 일 동안 붉다 하여 백일홍
배롱나무는 백일홍나무라고도 불립니다. 한 송이가 백 일을 피어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꽃이 번갈아 피고 지기를 되풀이하며 여름 내내 붉은 빛을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백일홍(百日紅) → 배기롱 → 배롱으로 소리가 변해 지금 이름이 됐습니다.
참고로 화단에 심는 한해살이 초화 “백일홍”(지니아)은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식물입니다. 나무인 배롱나무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합니다.
해마다 껍질을 벗는 나무
배롱나무의 가장 큰 특징은 줄기입니다. 나무껍질이 얇게 벗겨지며 그 아래 매끄러운 새 살이 드러나, 줄기 전체가 옅은 갈색과 회백색이 뒤섞인 얼룩무늬를 이룹니다.
줄기를 손톱으로 살살 긁으면 나뭇가지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간지럼나무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원숭이도 미끄러진다는 뜻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실제로 만져보면 도자기처럼 매끈합니다.

사진: “Flowers (Lagerstroemia indica)” by Hafiz Issadeen is licensed under CC BY 2.0. To view a copy of this license, visit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
서원과 사찰에 심은 이유
도산서원, 병산서원, 돈암서원. 이름난 옛 서원마다 배롱나무가 서 있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옛 선비들에게 이 나무는 청렴의 상징이었습니다. 껍질을 감추지 않고 해마다 벗어내는 모습이,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선비의 마음가짐과 닮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사찰에서 심은 이유는 조금 다릅니다. 해마다 껍질을 벗는 나무를 보며 수행자도 해마다 세속의 욕망을 벗어내라는 뜻을 새겼다고 전합니다. 같은 나무, 다른 의미로 두 공간에 뿌리내린 셈입니다.
묘목 고르기
배롱나무를 새로 들일 때는 다음을 살펴보세요.
- 줄기 표면: 매끄럽고 얼룩무늬가 고르게 있는지. 상처나 갈라짐이 심하면 피합니다.
- 가지 분포: 원줄기에서 가지가 고르게 뻗어 있는 것이 나중에 수형을 잡기 좋습니다.
- 뿌리 상태: 화분 묘목이라면 뿌리가 화분 바닥까지 고르게 퍼져 있는지 확인합니다.
심기와 관리
볕이 잘 드는 자리를 좋아합니다. 일조량이 부족하면 꽃이 부실해집니다. 배수만 잘 되면 흙을 크게 가리지 않습니다.
물은 흙이 마르면 흠뻑 주는 정도로 충분합니다. 뿌리를 내린 뒤에는 가뭄에도 비교적 강합니다.
화분 재배도 가능합니다. 이른 봄(2~3월) 웃자란 가지를 15cm 정도 잘라 거름기 없는 흙에 5cm쯤 꽂고 마르지 않게 물을 주면 삽목으로 새 나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지치기 — 시기가 중요합니다
가지치기는 새 생장이 시작되기 전, 늦겨울에서 이른 봄 사이에 합니다. 배롱나무는 그해 새로 자란 가지 끝에 꽃이 피므로, 묵은 가지를 정리해주면 새 가지가 힘차게 뻗으면서 꽃이 더 풍성해집니다.
방치하면 상당히 크게 자라니, 원하는 수형과 크기를 유지하려면 매년 한 번은 손봐주는 것이 좋습니다.
병충해 — 진딧물과 그을음병
배롱나무를 키우며 가장 흔히 마주치는 문제가 둘 있습니다.
진딧물은 4~7월 사이 자주 발생합니다. 즙을 빨아먹을 뿐 아니라 바이러스를 옮기고 그을음병을 유발하는 원인이 됩니다. 초기에는 비눗물을 희석해 뿌리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방제가 됩니다.
그을음병은 줄기와 잎이 검게 그을린 것처럼 변하는 병으로, 배롱나무주머니깍지벌레가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1년에 몇 차례 부화하므로(6~7월, 8월 하순, 9월경) 이 시기에 집중 관리가 필요합니다.
공통 대책은 통풍입니다. 가지가 밀생해 통풍과 햇빛이 부족하면 병해충이 훨씬 잘 퍼집니다. 정기적인 가지치기가 곧 병충해 예방입니다. 가을에는 떨어진 낙엽을 치워 병해충이 월동할 자리를 줄여주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이럴 땐 이렇게
줄기가 검게 그을려 보입니다 — 그을음병입니다. 통풍이 되도록 가지를 솎아내고, 필요하면 약제를 부화 시기에 맞춰 살포합니다.
꽃이 부실합니다 — 볕 부족이거나 가지치기를 안 해 묵은 가지만 남은 경우입니다. 늦겨울에 정리해보세요.
겨울에 잎이 다 떨어졌습니다 — 낙엽성 나무라 정상입니다. 봄이 되면 새순이 다시 돋습니다.
꽃말
배롱나무의 꽃말은 부귀입니다. 여름 내내 끊이지 않고 피는 붉은 빛깔에서 나온 뜻으로 보입니다.
마무리
배롱나무는 손이 크게 가지 않으면서도 여름 내내 마당을 붉게 채워주는 나무입니다. 해마다 껍질을 벗는 모습 하나로 선비의 청렴과 수행자의 다짐을 동시에 품었던 나무이기도 합니다.
이번 여름, 오래된 마당에서 이 나무를 만나거든 줄기를 한번 만져보셔도 좋겠습니다.
쇼츠 「배롱나무 — 해마다 제 껍질을 벗는 나무」 바로 보기 참고 자료
제 생각은요
저는 이 글에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지나칠 대목이 가지치기 시기라고 봅니다. 배롱나무는 그해 새로 자란 가지 끝에 꽃이 피는 나무라, 늦겨울에서 이른 봄 사이에 묵은 가지를 정리하느냐가 여름 꽃의 양을 사실상 결정하는데, 꽃이 부실하면 볕이나 거름부터 의심하기 쉽습니다. 그을음병 대책도 약제보다 통풍이 먼저라는 점에서, 결국 이 나무 관리의 절반은 가위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원과 사찰이 껍질 벗는 모습에서 청렴과 수행을 읽어냈다는 이야기는 알수록 흥미롭지만, 실제로 키우는 사람에게는 매년 한 번 가지를 손보는 습관이 그 어떤 상징보다 중요하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